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소돔의 죄를 냉대의 죄로 이해하셨다. 『성서』의 다른 구절들도 드러내 놓고 같은 말을 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 소돔 이야기를 인용하여 남녀 동성애자들을 단죄한다. 그 자체의 역사적 배경에서 이해하면 소돔 이야기에는 슬픈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남녀 동성애자들이 자신들과 다르거나 이상하거나 별스럽거나 혹은 그들의 말대로 "괴상하다"queer는 이유로 동성애자들을 반대하고 모욕한다. 레즈비언 여성들과 게이 남성들은 무리에 끼는 것이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이방인, 곧 외국인이 되도록 강요당한다. 그들은 가족에게 의절 당하고 자녀들과 헤어지며 직장에서 해고 당하고 아파트와 동네에서 쫓겨나며 유명인사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설교자에게 비난 받으며 라디오와 TV 종교방송에서 비방 당한 다음 학교에서 구타 당하고 길거리와 산간벽지에서 살해 당한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추측에 근거한 유대-그리스도교의 도덕성이라는 이름으로 이 모든 일들이 벌어진다.
그와 같은 사악함이야말로 소돔 사람들이 지었던 바로 그 죄다. 그와 같은 잔혹함이야말로 『성서』가 진정으로 거듭해서 단죄하는 짓이다. 따라서 추측에 근거한 "소돔의 죄"를 이유로 동성애자들을 억압하는 사람들 자신이야말로 진짜 "소돔 사람들"일지 모른다. 『성서』는 그렇게 이해한다.
--- pp 49~50
또 한 가지 어려움은 문어체 히브리어에는 모음이 없어서 오로지 자음만 기록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글로 쓰여진 단어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발음할 수 있다. 가령 영어로 된 “fnd”를 놓고 이 단어가 “fend”, “find”, “fund”, “fond”, “fined” 가운데 어느 것을 의미하는지 결정해야 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모음 하나만 바꿔도 엄청난 차이가 생긴다. 그리하여, 표준대로 읽으면 “사울은 야훼께서 자기를 버리시고 다윗과 함께 하시는 줄 알고 다윗을 두려워한 나머지”가 되는 「사무엘상」 18장 12절이 모음만 바꾸면 “그[사울]가 그[다윗]를 사랑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로 읽힐 수도 있다. 또 「사무엘상」 16장 21절인 “이리하여 다윗은 사울을 찾아와 그를 시중들게 되었는데”도 동사를 재귀동사로 만드는 모음 하나만 바꾸면 “그 앞에서 발기했다”라는 뜻이 될 수 있다. …… 무엇이 정확한 모음인지 알아내는 절대적인 방법은 없다.
--- pp 187~188
오늘날 남성 간 섹스와 관련하여 「고린토 1서」 6장 9절과 「디모테오 1서」 1장 10절이 주는 긍정적인 가르침은 무엇일까?『성서』가 매춘이나 근친상간, 간음에 대해 반대한다고 해서 남녀 간 섹스 자체를 금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성서가 시종일관 반대하는 것은 이성애의 ‘남용’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설령 “arsenokoitai”가 정말로 남성 간 섹스를 가리킬지라도 이 구절들이 남성 간 성행위 자체를 금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기원 후 1세기에 그리스어를 쓰는 유대-그리스도교에서 “arsenokoitai”는 아마도 남자들 사이의 착취적이고 음탕하며 방자한 섹스를 가리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구절들이 반대하는 내용 역시 남성 사이에 일어나는 성행위 전체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 동성애의 ‘남용’에 대한 반대인 것이다. 성문제 전반에 걸쳐서 성서가 요구하는 것은 상호 존중과 보살핌, 책임 있는 나눔이다. 함축적인 말로 하면 바로 사랑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가 단죄하는 것 역시 섹스 일반이 아니라 이것들에 대한 위배다. (167p)
--- pp 167
1950년대에는 이전과 유행이 바뀌어서 여자들이 바지 정장을 입기 시작했다. 많은 여자들이 그것에 거북함을 느꼈고 심지어는 도덕적으로 옳은지 아닌지를 놓고 논란까지 벌였다. …… 그들의 관습은 영원한 섭리, 곧 “언제나 그러했던 방식” 같아 보였다. 일부는 “여자가 바지를 입는 것은 결코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라는 주장까지 했다. 관습이 하느님의 법으로 둔갑한 것이다. 그리하여 단순한 사회적 풍습 문제가 도덕성 문제로 여겨졌다. …… 시대적 유행이 바뀔 때마다 그 문제들을 둘러싸고 비슷한 논란이 벌어졌다. 거북하게 느껴지면 뭐든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여겨졌고, 사회적 금기가 죄로 둔갑했다.
--- pp 71~72
고대 히브리인들의 마음에는 남자와 여자에 관해서도 매우 독특한 생각들이 있었다. 여자는 삽입 당해야 하며 남자는 삽입 해야만 한다. 여자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 “naqeba”는 마치 남자의 몸에는 구멍이 없다는 듯이 “구멍이 있는 자”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여자에 관한 근본적인 이미지는 성교할 때 남자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였다. 따라서 남자가 항문 성교로 다른 남자에게 성기를 삽입하는 행위는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의 기준을 뒤섞어서 혼란스럽게 하는 행위였다. 그것은 남자를 여자의 기능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레위기」 18장 22절이 금지한 것(다른 섹스 방식의 남성 간 성행위는 금지하지 않았음)은 정확히 말해서 바로 이렇게 다른 종류를 뒤섞는 것, 곧 용인된 성역할의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었다. 고대 히브리인들이 생각하기에 남성 간 삽입 성교는 만물의 이상적인 질서를 깨뜨리므로 부정하게 여겨져서 금지되었다. 그것은 망측한 짓이었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성결법 이면에 어떤 이유가 있었든지 간에 그와 같은 사고방식은 분명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윤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 pp 65
이번엔 성서에서 예를 들어보자. 복음서들 가운데 세 군데에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나온다. 이는 마치 돈이 많은 사람은 아무도 절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분명히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정말 그런 의미를 암시해 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일부 학자들의 지적에 따르면 예루살렘에는 도시의 방벽을 통과하는 매우 낮고 폭이 좁은 문이 있었다고 한다. 사막의 대상(隊商)이 그 문을 통해 들어갈 때 낙타들은 짐을 부리고 웅크린 자세로 문을 통과한 다음 도시의 방벽 안쪽에서 다시 짐을 꾸려야만 했다. 그 문이 아마도 “바늘구멍 the eye of the needle”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그 당시의 일상 세계를 이해하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이 분명해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부자들이 천국에 가기가 힘들다는 말씀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부자들은 먼저 물질적인 관심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검소한 삶과 진실함에 관한 산상수훈의 메시지를 다시 설파하고 계셨던 것이다. 만약 이와 비슷한 고려 사항들이 동성애에 관한 성서 본문들에 적용된다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우리가 지금까지 받아들여왔던 내용을 의미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 pp 18~19
천 년 전 서구 사회는 동성애에 꽤 무관심했으며 오히려 그것을 지지하기까지 했다. 동성애 하위 문화가 번성했고, 사제들과 수녀들은 사랑을 담은 편지와 시를 서로 써 보냈다. 유럽 전체가 영국의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의 로맨스에 즐거워했다. 새로 설립된 그리스도교 대학들에 다니는 학생들은 이성애자의 사랑과 동성애자의 사랑을 두고 정기적으로 찬반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유럽(서고트족이 지배한 스페인을 제외하고)의 어떤 법전에도 동성애 행위를 금지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1100년대 중엽에 이르러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 pp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