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이란 없다. 왜냐하면 인생에는 엔딩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인생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시작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의 시작은 우리가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내가 누구인가에 관한 기적과도 같은 진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들이다.
마음의 매듭을 풀 수 있는 7단계, 혹은 8단계 요령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하나의 선택권을 갖고 있다. 그 선택이 크고 작은 역경을 불러온다 할지라도 매일, 매 순간 우리에게는 금쪽같은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
‘마음을 닫아버릴 것인가, 아니면 다시 한 번 더 깊은 곳까지 마음을 열어보기로 할 것인가?’
당신이 완전히 자유롭고 열린 마음으로 산다면, 당신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면, 당신의 삶은 어떤 모습이 될까? 이리 와서 잠깐 내 옆에 앉아 한 번 생각해보라. 지금은 한여름 오후 나절이고 우리는 올리브 나무 아래에 앉아 있다. 우리는 함께 그리스식 피크닉을 즐긴다. 올리브, 페타 치즈, 금방 딴 토마토, 집에서 구운 빵, 차가운 그리스 와인, 수박과 포도를 앞에 두고 우리는 그저 살아 있음의 기쁨을 함께 나눈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걱정거리들을 날려버리고 나는 당신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나의 열린 마음이 당신의 열린 마음에게.
“뭘 바라면서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보다는 네가 줄 수 있는 게 무엇일지 생각하며 세상으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네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게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원하는 결과를 얻고 싶다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리란 걸 한 점 의심도 없이 믿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우리가 선언했으니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말이다.
“부자라는 건 풍요롭다는 뜻은 아니야. 그냥 돈이 많다는 뜻이지. 풍요롭다는 건 네가 스스로의 재능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걸 갈고 닦는다는 뜻이야. 그리고 가진 것에 만족하고 또 그걸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는 뜻이고. 네가 가진 걸 남들에게 베푸는 데 인색하지 않고, 가진 걸 잃을까 봐 두려워하며 살지 않는 게 바로 풍요로움이야. 남들이 가진 것과 네가 가진 것을 비교하지 않으면서 말이야.”
‘난관을 딛고 일어선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다. 두려움에 직면하면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내가 정말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놀랍게도 내 키가 그동안 내가 꿈꿔왔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걸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 인생에는 열어야 할 문들이 많이 있었고 그 문들은 완벽한 타이밍에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열리게끔 되어 있었다. 또한 그 문들이 항상 외부에 있으라는 법은 없었다. 내 안의 문들이 열리고 있었다.
그리스의 사모스섬에 가면 유명한 바위가 하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바위에서 에게해로 뛰어내리면 불행했던 모든 기억을 지울 수 있다고 한다. 봄이면 언제나 키프로스의 고향으로 돌아가 목욕을 하고 처녀성을 회복했다고 하는 아프로티테의 신화처럼 새로운 관계의 시작에 관한 흥미로운 은유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가 그 바닷물을 병에 담을 수만 있다면 매일 매일 스스로를 새롭게 만들 수 있을 텐데! 그렇지만 실망한 마음을 씻어내기 위해 꼭 바다로 뛰어들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저 작은 실망들을 받아들여 다시 승리로 바꿀 수 있을 만큼 우리의 마음이 아주 넓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된다.
어느 해인가 내 생일을 즈음해서 나는 내 영적 스승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또다시 1년을 혼자서 보냈다는 얘기를 했다. “아직도 혼자예요.” 나는 뭔가가 빠진 사람처럼 아쉬운 듯 말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나를 보며 언제나처럼 그 경이롭고 풍부하고 사실적인 화법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그냥 한 사람이지요.” 그 순간, 내가 쭉 갖고 있던 혼자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혼자가 아닌 한 사람이라는 그 시각이 나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온전하고 자유롭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것처럼 들렸다. 두려워하거나 갈망할 필요가 없이 어떤 형태가 되었건 사랑의 풍요로움을 공유하면 되는 거였다.
우리는 영혼과 소통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런 탐구를 별로 탐탁해하지 않는다. 열심히 일해라, 예뻐져라, 돈을 벌어라, 결혼해라 등등을 가리키는 이정표들은 수없이 많지만, 본연의 자기 모습을 잊지 말라고 알려주는 표지판은 없다. ‘소지품 챙기는 것을 잊지 마세요’라고 적혀 있는 현수막들은 있지만 ‘영혼을 두고 가지 않도록 유의하세요’라고 말하는 현수막은 없다. 열린 마음을 유지했다고 오스카상을 주지는 않는다. 이력서의 주요 체크 항목에 ‘순수함을 보존하고 있음’이라는 항목은 없다. 그런 이력서를 상상할 수나 있겠는가? 아마 인터뷰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마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직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고통을 마주 보고서서 똑바로 돌진해야 한다. 어차피 출구는 그 고통을 통과해서 나가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행여나 아픈 장소에 갇혀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거기 보이는 것을 똑바로 보면서 그 이름을 정확히 불러주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배신당하고 외면당한 상처, 사랑하는 사람을 도울 수 없는 고통 (…) 이 모두를 크게 소리 내 말하고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비밀의 장소에 숨어있는 것을 끄집어냈을 때 비로소 마음을 꽉 죄고 있던 그 고통을 몰아낼 수 있다.
21세기에 우리는 아름다움과 패션을 신으로 만들었다. 돈, 예술, 정치, 심지어 종교와 영성까지도 이제 우리가 맹목적으로 따라야 하는 신이 되었다. 본래 이것들이 만들어진 의도는 삶을 고양시키고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본말이 전도되어, 오히려 이것들이 주인 행세를 하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 ‘이렇게 돼야 해’ 하고 명령을 내리면 우리는 노예처럼 그 명령을 따른다. 영화나 잡지, 광고들은 도저히 우리가 따라할 수 없는 인위적인 이상향을 내세우고, 그러면 우리는 그저 환영에 불과한 그 이상향에 견주어서 자기 자신을 평가하는 지경이 되는 것이다.
이제 나는 내 인생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라본다. 무엇을 ‘고쳐야 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치유해야 하는가’라는 시각을 가지고 인생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뭔가를 고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는 나도 안다. 왜냐하면 그런 시도는 있는 그대로의 상황이나, 있는 그대로의 우리가 잘못되었다는 가치판단에 이미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로를 바꿀 수도 있고, 뭐가 우리에게 맞는지 뭐는 맞지 않는지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 뭔가 고쳐야 할 것은 없다. 마치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그런 것처럼, 우리 자신도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