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위기는 인간에게 좌절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초인적인 힘을 부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현암은 후자의 인물이었다. 그는 시대의 악조건 속에서도 대한민국 기업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경영자로 성장했다. 해방 후 엄혹한 결핍의 시절을 통과하며 위기와 시련과 난관을 겪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는 타고난 기질과 인품으로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고, 그 결과는 개인의 성공을 넘어 대한민국의 재건과 부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우리는 그동안 가려져 있던 그의 삶을 발굴해 격변의 시대를 헤쳐나가는 길잡이로 삼을 필요가 있다.
---「1부 [01] 가난한 식민지 소년, 불꽃을 품다」중에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 회사의 업무를 인수한 지배인입니다. 따라서 나는 여러분이 회사를 그만두고 나 혼자만 남는 한이 있어도 화약공판 지배인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다해나갈 것입니다. 지배인으로서 수행해야 할 나의 책임과 의무 가운데는 여러분의 급료를 지불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여러분의 급료만큼은 내가 책임지고 지급할 것입니다. 이제부터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는 우리 손으로 지키고 키워나가야 합니다. 화약공판의 앞날에 어떤 어려움이 닥쳐올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화약계의 등대수가 되어 해방된 조국에 이바지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여러분도 나와 함께 어떤 태풍이 휘몰아칠지라도 끝까지 이 나라 화약계의 등대수로 꿋꿋이 남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임해주기 바랍니다.”
---「1부 [02] '다이너마이트 김'의 탄생」중에서
‘그래, 우리가 다시 식민지가 되거나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돼. 자주국방만이 살길이지. 그렇다면 화약인인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한다.’ 경찰의 의뢰를 받은 현암은 즉각 제품 개발을 지시했다. 그렇게 한국화약은 군용화약 개발 연구에 착수했고, 1969년 5월 경찰에 수류탄을 납품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 일로 특수화약 개발에 자신감을 얻은 현암은 한국화약 내 전담부서를 설치하는 등 방위산업 참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바로 이것이 K-방산의 리더 한화의 시발점이었다.
---「1부 [방산] 반세기 전 뿌린 K-방산의 씨앗」중에서
현암의 판단 기준은 명확했다. 국가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대의명분만 충족한다면 난관이 예상되더라도 자신이 감내하겠다고 결심했다. 정부 역시 국내 베어링산업의 정상화를 위해선 자본력과 경영 능력이 검증된 유력 기업의 인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마침내 한국화약은 1964년 창업 12년 만에 화약이 아닌 업종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는 화약산업을 통해 얻은 국민적 성원을 또 다른 기간산업인 기계산업으로 이어가겠다는 현암의 강한 의지가 없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선택이었다. 손익계산서를 철저히 따지는 기업이 최소한 10년 이상의 적자가 예상되는 사업에 진출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기업 활동을 통해 국가 사회에 기여하자’는 한국화약의 사훈이자 창업이념은 그렇게 또 한 번 입증되었다.
---「1부 [기계] 10년 적자를 감수하고 뛰어든 기간산업」중에서
1971년 4월, 이란산 원유 22만 배럴을 실은 탱커 시파라호가 경인에너지 전용 부두에 접안하면서 5월 22일 경인에너지는 첫 가동을 시작했다. 현암이 품었던 또 하나의 숙원 사업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제3정유공장의 탄생은 전력 파동으로 혼란을 겪었던 당시 우리 사회에 에너지 공급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한국경제 성장사에 한 획을 그은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1971년 정유공장 가동에 이어 1972년 화력발전소가 완공되면서 율도발전소에서 준공식이 거행됐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한국화약의 경인에너지 화력발전소와 정유공장의 준공은 공업화 과정을 밟고 있는 우리나라 경제에 또 하나의 큰 경사이며, 기간산업으로서 그 역할을 충분히 발휘해 값싸고 품질 좋은 전력을 공급해 주길 바랍니다.”
---「1부 [에너지] 될 때까지 도전해 뜻을 이루다」중에서
당시 정부 측의 재해 복구 예산은 50여억 원이었지만 현암은 전 재산을 바치겠다며 총 90억 원을 내놓았다. 철도청의 잘못이 있음에도 현암이 독자적으로 피해 보상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 팽배했으나, 정작 현암 자신은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중략) 한 기업가가 실천한 살신성인 정신은 존폐 위기에 몰린 기업을 살리고, 피해를 입은 국민들을 진정으로 위로했다. 혼신을 다해 시련을 이겨낸 현암은 일생일대의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은 뛰어난 기업가이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준 선구자였다.
---「1부 [이리역폭발사고] 절망의 끝에서도 놓지 않았던 사명」중에서
감찰이든 압수수색이든 한국화약으로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현암의 지시 아래 한국화약은 ‘적정가격 유지’, ‘무제한 공급’, ‘철저한 서비스’를 영업 방침으로 정해놓고 엄격하게 사업을 관리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현암의 평소 경영 방침은 확고했다. 간혹 직원들이 실수로 회사에 큰 손해를 입히는 건 용서해 주었지만,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비리만큼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중략) “잘나갈 때일수록 자중하고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한다.” 현암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은 물론 전 직원들에게도 자중자애할 것을 강조했다. 현암은 원래 타고난 성품도 그러하지만 어딜 가서도 앞에 나서거나 우쭐댄 적이 없었고, 묵묵히 주어진 책무를 다할 뿐 가급적 눈에 띄지 않으려 했다.
---「2부 [청렴] 1000만 원을 손해 봐도 10원 도둑질은 안 된다」중에서
현암은 결정이 빠르고 한번 결정한 일은 뚝심 있게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식의 “돌격 앞으로!”만 외치는 기업인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에는 누구보다도 유연한 사고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간혹 현암이 실행하기 어려운 업무를 지시하면 직원들은 검토 끝에 자신 있다거나 확실하다는 보고를 했다. 실제로는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하면 된다’는 정신이 강조되던 시절이라 직원들도 어떻게든 밀어붙여 성공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현암은 그런 직원들의 투지를 높이 사면서도 편협된 사고를 경계했다. “세상에 절대적이라는 건 없어. 하지만 모든 게 변하는 이 불확실한 시대의 변수를 상수로 바꿔가는 것이 기업인으로서 해야 될 일이지.”
---「2부 [추진력] "하면 된다"」중에서
현암은 정작 본인은 궁색해 보일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했지만 어렵거나 힘든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을 도울 때는 큰돈을 쾌척했다. 다만 남을 도울 때에도 그 나름의 철칙은 있었다. 첫째, 이왕 도와주기로 결정했을 때는 생색을 내지 않는다. 둘째, 기부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한다. 그리고 현암이 평생 가장 철저하게 지킨 기부의 원칙은 이 세 번째였다. ‘도움을 청하는 지인이 오면 70~80% 정도만 도움을 준 뒤 나머지는 자력으로 해결할 여지를 둔다. 그리하여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한다.’
---「2부 [이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중에서
‘북일사립학교가 가난한 나에게 성장의 자양분이 되어줬으니, 이제 여력이 생긴 내가 다른 아이들을 위해 행동해야 할 때 아닌가!’ 현암은 부존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부강해지려면 인적자원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유능한 인재들을 길러 국가 부흥의 기둥이 되게 하면 우리도 언젠가는 일본이나 미국을 능가하는 부강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암은 향후 우리의 미래 세대가 지금의 세대보다 더 나아야 하고, 그래야만 그들이 전 세계와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교육으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런 가치관을 지녔던 현암의 큰 뜻과 포부는 천안북일고등학교의 설립으로 실현되었다.
---「3부 [02] 백년대계를 세웠던 육영사업가」중에서
현암은 사업상 미군과도 오랜 시간에 걸쳐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화약과 방산사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미8군 사령관이나 유엔군 사령관 등과 인연을 맺다 보니 자연스럽게 현암은 미국통이 되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의장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에도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맥그루더 장군이 ‘다이너마이트 김’의 안부를 먼저 물었을 정도였다. (중략) 미군 골프장은 출입 절차가 까다로운 곳이었지만 현암은 늘 프리패스였다. 당시 미8군 사령관은 골프장 책임자에게 ‘언제든 현암이 오면 내가 온 것처럼 똑같이 예우하라’는 친필 메시지까지 내려 보냈을 정도였으니, 현암에 대한 미군의 특급 예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3부 [03] 진심을 다한 민간외교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