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으뜸가는 목적”(“으뜸가고 가장 높은 목적”, 대교리문답)
우리가 잘 알고 있는 “end”(목적)라는 단어는 대체로 “한계, 경계, 종결”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이 단어는 “목적, 의도, 계획”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제1문답은 사람에게 “으뜸가는” 목적 외에도 다른 목적들이 있음을 인정한다.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목적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으뜸가는” 목적이라는 말은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교리문답은 부차적인 목적들에 관심을 두지는 않지만, 그런 목적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들을 사용해 으뜸가는 목적을 추구해야 함을 말한다. --- p.14
“하나님”
“색슨족의 고대어에서 ‘God’은 원래 ‘good’과 의미가 동일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 의인화된 선이다. 이는 단지 언어유희가 아니라 깊은 진리를 품고 있다”(프레더릭 로버트슨).
하지만 웹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앵글로색슨어에서 이 단어와 ‘good’을 동일한 철자로 썼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왔다고 추론해왔다. 하지만 그런 추론은 초창기 인류의 실제 인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생각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제외하고[제44문을 보라], 최고신의 이름은 통상적으로 지존자나 최고 권력과 연결되어 군주나 통치자와 동등한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어에서 신을 가리키는 ‘Godd’이 주, 주인, 일인자, 통치자를 의미함은 이것이 ‘God’의 진짜 의미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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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는 호의, 긍휼, 용서를 의미한다. 은혜와 사랑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다만 은혜는 사랑이 특정한 상황에 맞춰 나타난 것이라는 점에서만 다르다. 예컨대 은혜와는 달리 사랑에는 한계나 법이 없다. 사랑은 동등한 사람들 간에도 존재할 수 있고, 윗사람에게로 올라갈 수도 있으며, 아랫사람에게로 흘러내려갈 수도 있다. 반면 은혜는 본질적으로 오직 한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즉, 은혜는 언제나 흘러내려간다. 은혜는 진정으로 사랑이지만, 스스로를 낮춘 사랑이다. 왕이 자신과 동등한 자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지만, 자신의 신민을 사랑하는 것은 은혜라 불린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언제나 은혜라고 부른다. 그것은 진정으로 사랑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피조물들을 향한 사랑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모든 것,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선의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은혜라 불린다.”
--- p.89
한 라틴 저술가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데 행위가 설 자리는 없다. 사람은 자연법이든 모세 율법이든 복음적인 법이든 그 법에 의한 도덕적, 제의적, 사법적인 행위 없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믿지 않는 사람도 고귀한 사람일 수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정직함에서 고귀한 사람이 있고, 명예에서 고귀한 사람이 있으며, 애국심에서 고귀한 사람이 있고, 인류애에서 고귀한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런 고귀함 속에도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게 해줄 요소가 없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의 삶이 끝날 때까지 모든 점에서 완벽하게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모리슨이 로마서 3장에 대해 쓴 훌륭한 연구서를 보라.)
“당신은 ‘믿음도 행위가 아닌가’라고 말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문법적인 의미에서는 믿음도 행위다. 하지만 참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믿음은 단지 수동적일 뿐이다. 믿음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그 어떤 것도 주지 않는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이 그 믿음을 선하게 여기시게 할 뿐이다. 믿음은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의 형제들이여, 다른 은혜의 손은 일하는 손이지만, 믿음의 손은 단지 받아들이는 손일 뿐이다. 그래서 사도는 ‘일하는 자에게가 아니라 믿는 자에게’라고 말한다”(굿윈).
--- p.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