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오루는 롯코산의 호리병 연못가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그 애는 열네 살로 나와 가즈히코와 동갑이었다. 성격이 좋은지 나쁜지 가늠하기 어려운 아이였다. 얼굴도 약간 귀엽게 생긴 정도지 눈길을 잡아끌 만큼 특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웃을 때 묘하게 매력적인 입매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와 가즈히코 둘 다 가오루를 단번에 좋아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꾸라졌다가 함께 데구루루 굴러떨어진 것 같은, 그런 첫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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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이 멈춰 선 이유를, 나와 데라모토 씨는 금세 알아차렸다. 웅성거리는 독일어 대화가 난무하는 실내, 붉은색을 도드라지게 사용한 기둥과 벽면, 그 안쪽 구석에 자리한 작은 테이블에 그녀가 혼자 앉아 있었다. 뒤에서 보기에는 비스듬한 각도였지만 틀림없었다. 목 뒤로 머리카락을 묶은 검은색 리본. 모자와 코트는 벗고 있었고, 검정 스웨터를 입은 상체를 꼿꼿이 세운 채 벽에 걸린 자수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요리는 아직 나오지 않았는지 테이블에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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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 머리에 뭔가가 닿았다. 사람의 손이다.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머리를 뒤로 젖혀 확인할 필요도 없이 그건 가오루의 손길이다. 틀림없다. 누운 채로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갖고 노는 것이다. 내 옆에서 눈을 감고 있는 가즈히코의 머리에는 가오루의 손이 뻗어 있지 않았다. 내 머리만 만지작거리는 거다. 나는 가즈히코보다 몇 배는 더 흡족한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가 광석 라디오를 켰는지 음악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에리 지에미의 〈테네시 왈츠〉다. 초봄부터 유행한 이 노래의 인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오루는 내 머리카락을 만지는 걸 그만두고 휘파람으로 나지막이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엊그제와 마찬가지로 나도 같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을 불면서 눈을 뜨고 가즈히코를 쳐다보니, 녀석도 눈을 뜬 채 부루퉁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가즈히코는 휘파람을 불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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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긴 의자에 앉아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려 바깥에 시선을 두었다. 그 창가에서는 대문과는 별개로 난 자동차 출입구를 내려다볼 수 있다. 창문 아래 자갈이 깔린 마당에 검은색 자동차가 한 대 서 있었고, 잠시 후 그 차를 향해 우산 하나가 다가갔다. 기모노 차림의 마쓰 아줌마가 자기 몸은 비에 반쯤 젖어가면서 누군가가 비를 맞지 않도록 우산을 받치며 걷고 있다. 우산을 쓰고 있는 사람은 연한 색깔의 여름 정장을 입은 남자로, 아마 히토미 고모의 남편일 것이다. 하지만 우산 아래에 있어 얼굴은 안 보인다. 한쪽 다리를 약간 끄는 것 같은 걸음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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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교육, 운전 실습, 견습 탑승을 거쳐 정식으로 기관사 임명을 받자, 히토미가 긴쓰바(밀가루 반죽에 팥소를 넣어 만든 일본 전통과자를 사와 조촐한 축하 파티를 해줬다.
“기관사님, 유니폼 입고 경례해 봐요.”
나는 말 같지도 않은 주문을 하지 말라며 히토미의 요청을 무시했다.
“아이, 그러지 말고 한번 입어봐요. 친구네 오빠한테 카메라 빌려왔단 말이에요. 사진 찍게 해줘요.”
하도 졸라대는 통에 못 이기는 척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호큐전철의 남색 유니폼에 달린 새 기관사 배지. 히토미는 그것을 자신의 손수건으로 닦으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자, 그럼 찍겠습니다. 경례 부탁해요. 와, 늠름하다, 멋져요, 반하겠어요!”
사진을 찍으며 히토미는 혼자 신나서 떠들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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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혹시 네 엄마가 흑백합 오센?”
내가 물었다. 결혼 후에 다시 내연 관계가 부활한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었으나, 가오루는 부정했다.
“아냐, 우리 엄마는 그런 불량한 생활과는 거리가 멀어. 애초에 집이 가난해서 여학교에는 다니지도 못했대.”
“그럼 그 후엔…….” 하고 가즈히코가 물었다.
“흑백합 오센은 어떻게 됐어?”
“글세, 거기까지는 못 들었어.”
머릿속에 가오루가 며칠 전에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아빠는 매사에 그런 면이 있었어.’
기일 다음 날이었다. 카메라, 쌍안경, 그 밖의 여러 가지 물건을 사는 데 돈을 쓰는 아버지.
‘그런데도 한번 싫증 나면 눈길도 주지 않았다니까.’
히토미 고모가 했던 그 말에 흑백합 오센에 대한 비정함이 더해져 가오루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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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입방아?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이따위 협박은 무시하자. 처음엔 그렇게도 생각했다. 그러나 응하든 무시하든, 상대는 앞으로도 계속 집요하게 나를 따라다닐 것이 뻔하다. 손전등 불빛이 만든 원 안에 기요지의 모습이 보였다. 상대도 손전등으로 날 비춘다. 그가 내게 다가와 걸음을 멈춘다. 무언가를 말하기 전,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머리를 향해 두 발. 서Walther P-38. 독일어를 할 수 있는 기쿠오는 이걸 ‘발터’라고 발음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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