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캔버스가 가장 아름답다.” 어느 화가의 말이 떠올랐지만, 나는 늘 세상을 색칠하고 싶은 쪽이다. 색채를 적극 활용해 히가시카와의 아름다움을 촬영하다 보니 저어하는 마음도 생겨났다. (...) 촬영할 때마다 동행했던 생태 가이드 시오야 씨는 대화 중에 말했다. “우리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건, 우리 마음에도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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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위해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길을 따라 이끌리듯 다니며 풍경 속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이번 여정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믿어지지 않은 시간의 감각이었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이곳에서는 아무런 변화를 느낄 수 없고, 그런 탓에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만 같았다. 어떠한 생의 흔적도 없이, 그저 완전한 고요함이 머물 뿐이었다.
--- p. 57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밖에 나가는 일이 왜 이렇게 힘들까. 의욕이 나지 않았다. 나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걷고, 돌아와 샤워를 하는 일련의 모든 일들이 귀찮고 힘겹게 느껴졌다. 누워 있으면, 누군가 내 몸을 밑에서부터 깊이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나는 그 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겨우겨우 힘을 끌어모아 밖에 나가는 날이 있기는 있었다. 늘 한밤중이었다. 낮에는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밤이 되고서야, 하루를 마무리하기 직전 ‘걷기라도 하자’라는 마음이 드는 날, 간신히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 p. 70
내겐 이러한 여담이 세계를 지지하는 구성물처럼 여겨진다. 무슨 역할을 하는지 짐작하기 힘들고 진실 또는 거짓의 경계가 불분명하며 때로는 실존하는지 여부도 불투명한 사물들, 기억들, 일화들의 우주. 걷기는 이러한 틈새를 마주하는 급진적인 행위다. 이안 싱클레어는 걷기가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주장한다. 국수주의와 극우주의 같은 배타적 사고방식이 득세하고 감시와 보안이 일상화되는 팬데믹 시대에, 걷기는 공공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다. 다만 여기서 걷기란 단순한 의미에서의 산책이나 순례 따위가 아닌 금지된 곳을 횡단하기, 잊혀지고 버려진 지역과 직접 마주하기, 경계를 넘어서기, 그리고 그곳에 대해 말하고 쓰기와 연결된다.
--- p. 74
그 기간 동안 우리는 몇 번이나 호텔 근처 산책로를 걸었다. 엄마는 데크 사이를 비집고 자라난 잡초처럼 시간을 뚫고 나타나는 기억을 나에게 읊었고,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눈앞의 청량한 풍경 위로 다른 시공간이 겹쳐지는 기묘한 경험을 했다. (…) 그리고 이후로도 우리는 종종 차마 지우지 못한 사진들을 넘기며 그때의 대화와 감각을 곱씹는다. 옆으로는 바다가 치고, 반대쪽에는 작은 소나무들이 자라며 모래에 침식되어가는 데크를. 그 비루한 산책로에서 우리가 나눈 것들을.
--- p. 82
브레히트와 코스트코에 갔다.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회원 가입을 위한 줄이었다. 그 앞에서 서성이자 한 카드사 점원이 다가와 코스트코 회원인지 물었다. 아니라고 답하니 코스트코에서 쇼핑을 하려면 연회비를 납부해야 하며, 결제는 코스트코와 제휴한 신용 카드나 현금으로만 가능하다고 했다. 또한 신용 카드는 현장에서 발급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브레히트는 신용 불량자이므로 카드를 발급받을 수 없었고 수중에 현금도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코스트코를 사랑하는데 신용 불량자이거나, 현대 카드도, 현금도 없을 때 당신이 택할 수 있는 건 하나다. 코스트코를 산책하는 것.
--- p. 85
우리가 서로의 엽서인 만큼이나 우리는 어디에선가 좌절해야 한다. 삶은 이어지고 현실은 포장되지 않는다. 여행지에서의 산책, 혹은 여행 같은 산책, 혹은 여행이기를 바라는 산책에는 모두 잠깐의 자기중심적 환상이 있다. 물론 환상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겠느냐마는. 나는 광화문의 길쭉한 건물들을 올려다보면서, 지금 저 안에서 움직이고 있을 사람들, 동물들,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그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나의 상상력을 탓하면서, 가만히 서서는 엽서의 일부가 되곤 하는 것이다.
--- p. 96
코로나19로 일상이 급변하던 2020년 4월 초순, 멀리 나가기가 어려워지면서 어쩔 수 없는 마음으로 카메라를 들고 집 근처를 걷기 시작했다. 분주했던 일상에서 갑자기 한가로운 나날들로 내던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탓인지, 도심 속의 자연마저도 슬로 모션처럼 느껴졌다. 주변을 조금 걸어다니는 것만으로도 연속되는 평범한 일상 속의 풍부한 리듬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느리게 움직일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 깊게 반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p. 111
“실례합니다.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 순간, 마치 주변 세계가 사라지고, 오직 우리 둘만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에 빠집니다. (…) 자, 이제 특별하고 놀라운 순간이 일어나는 데에는 고작 3분쯤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걸리는 1분, 그들을 촬영하는 데 필요한 1분, 그들과 껴안고 작별 인사를 나누는 시간 1분까지.
--- p. 181
스크린에 투사된 모노크롬의 표면은 하나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스크린이라는 무의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또 다른 무로서의 조명에 가깝다. 필름 영사를 통한 전통적인 스크리닝 방식을 디지털 스크리닝이 대체한 이후 이런 조명적 특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필름 스크리닝에 서의 흑색이란 빛의 투과가 가로막혀 스크린에 드리워진 어둠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디지털 스크리닝에서의 흑색은 흑색에 해당하는 빛이 스크린에 투사된 것, 그야말로 일종의 조명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스크리닝은 오늘날의 스크린에서 온전히 어둠을 몰아내고 있다.
--- p. 228
희망과 관련해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표현은 사도 바울의 정의다. “눈에 보이는걸 누가 희망합니까? 우린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희망합니다.” 말하자면, 희망은 불가능성과 관련되어 있다. 누군가 희망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희망의 기능을 모르는 것이다. 그런 인식이 영화에 몸담은 사람들에게까지 퍼져 있다는 건 대단히 문제적이다. (...) 책에서 쓴 대로 희망은 전망과 다른 의미다. 희망은 충동을 불러일으키지만, 전망은 비즈니스의 용어다. 적어도 영화를 하는 사람이라면 희망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는 누구나 전망의 언어를 말하더라. 영화를 만들고 비평하는 사람들이 희망을 갖추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본다.(유운성)
--- p. 232
제가 기억의 죽음을 인식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쯤이 아닌가 합니다. 그 일에 대해 제가 아는 사실은 이런 것들입니다. 지금 근무 중인 회현역 근처의 낡고 오래된 향수 가게 앞 버스 정류장에서 애인은 버스를 타고 멀리 떨어진 자신의 집으로 가서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것. 연락 두절인 그를 기다리던 저는 어쩌다 그 가게에서 일하 게 되었다는 것. 퇴근 후엔 그와 함께 걷던 길을 걷고 또 걷다가 혼자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는 것. 그러다 언젠가부터 그의 냄새를 잃어버렸고 이제는 전혀 기억할 수 없다는 것.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저는 누군가와 이별할 때마다 상대의 냄새를 잃어버렸습니다.
--- p. 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