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1는 “인간은 이주할 때 자신의 검뿐 아니라 새와 네발짐승, 곤충, 채소 그리고 과수원까지 함께 지고 간다.”라고 했다. 과일나무를 재배하기 위한 노력은 역사적으로 지역과 대륙을 연결해 왔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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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을 먹는 행위는 인간의 식사를, 궁극적으로 그들의 삶을 분명 향상시켰다. 그 결과 사람들은 나무의 구조와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능력에 영향을 끼쳤고, 훨씬 더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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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인류가 나타나기 전, 과일나무를 오가며 자연으로 하여금 열매를 선택하고, 번식하도록 도운 것은 바로 동물이었다. 예를 들어 새가 새콤한 과일보다 달콤한 베리류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잘 익은 베리류의 씨앗이 가장 널리 퍼졌고, 그만큼 싹을 틔우는 능력이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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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서 과일을 먹는 영장류는 인지 능력에 더 의존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잎만 먹는 동물의 뇌에 비해 과일을 먹는 동물의 뇌가 25퍼센트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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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지리적으로 유사한 지역에서 온 야생 나무에서 올리브를 수확했다는 가장 오래된 증거는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과도기인 중석기 시대(기원전 1만 5000년~1만 년)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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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야자 씨는 동물에게 사료로 주거나 태워서 연료로 삼았다. 나무가 거의 자라지 않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는 야자나무 줄기로 전쟁이나 무역용 선박을 건조하고 농기구와 가구를 만드는 등 매우 유용하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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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에서 가장 키 큰 식물인 야자나무는 항상 지역 식물 생태 계의 수직 구조를 결정해 왔다. 넓게 펼쳐지는 수관의 잎들은 주변 식물들을 보호하듯 아래쪽 미기후를 더 습하고 시원하게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해당 지역의 기후 조건과 음식 선호도에 따라 무화과, 석류, 대추, 오렌지, 살구, 망고, 파파야 같은 다른 과일나무가 종종 야자나무 아래에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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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일구는 일은 내세를 위한 행위였다. 사람들은 자연의 순환을 지켜보는 신을 묘사한 예술 작품들을 통해 정원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존재가 바로 그 신들이라는 것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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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의 정원들은 인간이 신에게 제물이나 공물을 바치는 장소이기도 했다. 신들이 지상에서 시간을 보내기에 특히 쾌적한 장소였기 때문에 이러한 의식과 경건한 관행에 무엇보다 적합하다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무슨 과일을 재배하는지에 따라 그 정원에 적절한 신들이 따로 있었다. 예를 들어 포도 덩굴의 신은 오시리스였다. 포도 수확 과 관련해서는 레네누테트라는 특별한 여신이 있었고, 심지어 포도 압착 장비조차 신성한 대변자를 뒀는데, 사자 혹은 양의 머리를 가진 신 셰스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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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거의 완벽한 과일이다. 다른 많은 과일보다 더 오래 저장할 수 있고 멀리 운반할 수 있다. 말린 사과 조각은 벌레가 잘 꾀지 않고 박테리아나 곰팡이에게 번식할 발판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보관이 훨씬 용이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일찍이 발견했을 것이다. 일부 사과는 건조하면 쓴맛이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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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접붙이기 기술에 친숙했다. 그들은 소아시아 이웃들과 밀접하게 교류했는데, 이곳 주민들은 과일나무와 과일나무 재배법에 대해 매우 잘 아는 지식의 원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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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은 또한 흑해 지역에서 육지로 넘어온 양조용 포도에 감탄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의 아들 디오니소스가 이 포도를 발견하고 인간에게 소개했다.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이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것 중에 이보다 더 훌륭하고 가치있는 것은 없다.”라고 한 말은 꽤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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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로마 정원은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에 걸쳐 조성되었다. 이탈리아 반도나 아프리카 북부 점령지, 소아시아, 이베리아 반도 혹은 중앙 유럽과 서유럽 어디에 있든 그 지역의 기후 조건을 반영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이 팽창함에 따라 대추야자나무, 석류나무, 자두나무, 체리나무 같은 새로운 식물은 영원의 도시 로마로, 그리고 로마 영토의 또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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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은 포도 외에도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대륙 여러 지역에서 나는 과일들을 영국으로 가져왔다. 로마의 정원 문화가 제국의 서쪽 끝까지 미쳤다는 증거는 웨스트서식스주에서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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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사와 수녀들은 숲에서 딸기와 산딸기를 채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최초로 재배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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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근교 베르사유는 1682년 프랑스 궁정이자 정부 부처 소재지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새로운 텃밭이 완공되었다. 궁전의 다른 구역과 마찬가지로 텃밭은 왕의 대중적 이미지를 위해 디자인되었다. 전체와 조화를 이루며 자연 위에 군림하는 지배력을 드러내려는 그 시대의 전형적 열망을 담은 세련된 예술 작품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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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왕은 이 과일, 특히 오랫동안 떠오르는 태양의 상징으로 여긴, 설탕만큼 달콤하고 향기로운 봉크레티앵 디베를 특별히 좋아했다. 버터 같은 농도와 사향 향기라는 고유한 특성을 자랑하는 이 배는 신화 같은 일화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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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8년 베를린 궁 왕족들의 치료를 담당했던 약방을 통해 이 왕의 체리를 신선하게 먹는 것 외에도 체리 라벤더 물, 블랙체리 브랜디, 새콤한 체리 시럽(여기에는 마리골드Calendula officinalis 꽃봉오리를 넣기도 했다), 체리 절임까지 다양하게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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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잘 알려졌듯, 시트러스는 이탈리아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등장했다. 중국 시인, 두보 杜甫, 712~770의 1,200년 전 기록이 한 증거다. “어느 가을날, 숲속 누각, 향기로운 오렌지나무 천 그루…….” 또한 그는 소위 말하는 ‘오렌지 송가’에서 오렌지나무가 나라 밖으로 유출되는 일 없이 고향에서만 자라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분명 누군가 이 규칙을 어겼고, 오늘날 오렌지는 세계 곳곳의 열대와 아열대 지역에서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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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 농사의 열렬한 지지자 중에는 심지어 미국 대통령들도 있었다. 1760년 조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 1732~1799 은 버지니아에 있는 사유지 마운트버넌 Mount Vernon에 과일 묘목 수천 그루를 심었다. 그는 과일 농사 활동을 일기로 남겼는데, 다양한 나무 품종을 접목하는 것 같은 작업도 기록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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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 위 브라질 반대편에는 예전에 실론으로 알려졌던 스리랑카가 있다. 한때 열대 우림으로 뒤덮여 있던 이 섬나라에는 열대 지방의 과일나무에 유용하게 접근할 수 있는 대단히 흥미로운 예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그곳에서 가장 흔한 농경 방식은 게와타 Gewatta 로, 여러 과일 나무와 허브, 채소를 재배하는 정원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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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사과 스파클링 와인을 처음 개발한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된 카를 자무엘 호이슬러 Carl Samuel Hausler, 1787~1853는 과수원을 체계화하는 방법에 관한 매우 분명한 생각이 있었다. 다양한 과일나무 품종에 대한 의견도 명확했다. 종이 다른 과일나무들을 “하나씩 번갈아 가까이 심거나 심지어 이것저것 섞어 심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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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한 올리브는 마을로 가져와 기름을 짰고, 르누아르는 처음으로 나온 올리브유를 따뜻한 토스트 위에 뿌리고 소금 쳐서 먹는 것을 무척 좋아해 기다리기 힘들어할 정도였다. 그는 맛만 보고 자신의 사유지에서 자란 올리브로 짠 올리브유를 구분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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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인 원리는 식물과 동물, 물질적 환경이 상호 작용하는 방 식을 이용하는 것이다. 홀처는 1962년 아버지에게 이 사업체를 물려받은 후, 연못을 포함한 테라스를 건설하는 등 경사진 들판의 풍경을 획 기적으로 바꾸는 것으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와 그의 아내 베로니카 Veronika 는 이후 줄곧 농장을 운영해 왔다. 부부는 자신들만의 매우 구 체적인 철학에 따라 나무를 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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