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노란색으로 탈색을 했다. 원하는 머리색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번의 탈색이 필요한데, 한 달도 못 가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검은 머리카락 때문에 탈색과 염색을 계속 반복해야 한다. 신규 교사 시설엔 긴 머리를 감추고 커트 머리 가발을 쓰고 다니기도 했고, 그때그때 취향이 드러나는 복장을 즐겨 입기도 했다. 어쩌면 그간 교사로서의 외적 본보기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취향을 존중하면서 나름의 교육관을 가지고 교직 생활을 해 왔던 것 같다.
교직 생활이라는 게,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것은 잘 안다. 교육자로서 갖춰야 하는 자격과 요건이 많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율도 세부적이다. 그런데도 오랜 시간 취향을 존중하며 교직 생활을 할 수 있던 원동력은 교사가 먼저 행복해야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교실을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p.4
특히 관계에 있어서, 신규 교사들에게 자주 들려주던 이야기가 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자기다움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관습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무조건 이해하고 수용하려 하기보다, 자신의 가치관과 취향을 솔직하게 표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서로의 차이를 수용하면서도 각자의 자기다움이 공존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교실 속 선생과 학생의 관계에도 어느 정도 적용된다. 때론, 아이들을 무조건 수용하는 것보다, 선생과 아이 모두 각자의 자기다움이 어느 정도 공존할 수 있도록 서로 의사 표현을 할 때 상호 간에 소통이 더 원활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 p.5
최근에는 학부모에게 ‘질문’을 많이 던지려고 애쓴다. 오히려 경험이 적었을 때 상대방에게 나의 견해를 더욱 적극적으로 쏟아 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내 생각뿐 아니라, 학부모의 생각도 소중해졌다. 둘 다 꺼내 놓고, 더 나은 선택을 하고 싶다. 아이들을 위한 문제니까. 그리고 오랜 공부를 통해 나는 책이란 것도 누군가의 합리적 사고를 담은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책을 참고한다고 한들 현실의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과 배경 안에서 선택하게 될 것이니까.
--- p.36
초등학교는 기본적으로 같은 학년 선생이 함께 교육 과정을 협의하고 학급 운영에서도 큰 차이를 두지 않으려는 문화가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프랜차이즈 카페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 반의 아이들 성향이나 선생의 특기에 따라 학급 운영 방법은 다양하게 이뤄지는 편이다. 학급 운영에서 필수적인 매뉴얼이 교사 커뮤니티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담임마다 창의적으로 운영하며 나름대로 효과성이 뛰어난 시스템을 교직 생활 내내 개선해 적용해 나간다.
이때 이러한 차이를 알아차리고 관심을 두는 아이들 사이에서 각 반 시스템의 비교가 이뤄진다. 그 과정에서 다른 반 아이들이 불평하거나 우리 반 아이들이 불평을 할 수 있다. 나는 대체로 그런 경우 다른 반 아이들의 생각보다는 우리 반 아이들의 의견에 더 집중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우리 반 아이들의 공감을 이끌어서 대처하는 편이다. 우리 반 아이들이 친구들이나 부모님께 우리 반 운영에 대한 홍보대사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나 대신에.
--- p.58
연극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때로는 논리적으로만 아이들 관계를 가르치려 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나의 경험을 말해 주고 싶어서다. 매우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대로 아이들에게 제시하고 던져 보라는 것이다. 꼭 내가 해결사가 될 필요는 없다. 그저 판을 깔아 주고, 그 판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서 즉각적으로 생각나는 대로 즐기곤 했는데 돌이켜보면, 바로 그런 점이 내 스스로를 학교에서 즐거운 선생님으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 p.100
다시 신규 교사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지금과 같은 길을 걸을 것 같다. 내가 궁금하고 해 보고 싶은 것은 마음껏 배우고, 마음껏 적용해 보는 재미가 상당했었다. 그 과정이야말로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다. 부딪쳐 보고, 수정하고, 도전해보고 아니면 돌아가면 되니까. 이렇게 살다 보면 남들은 편하다고 생각할 초등학교 선생이란 직업도 매우 피곤하고 힘든 직업이 될 수 있다. 아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게 많은 교사는 퇴근 후에 녹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 다 해 보고 나면 자신만의 리듬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무엇에 힘을 주어 일하고, 어떤 때 가볍게 힘을 빼고 진행해야 하는지 자신만의 리듬과 박자를 갖게 되더라.
--- p.151
“이젠, 학교가 징글징글하지 않아?” 그럴 때가 있다. 아니, 많다. 도저히 못 견디는 상황이 나라고 없겠는가? 하루에도 열두 번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관계로 야기되는 복잡 미묘한 감정은 늘 징검다리 건너듯 해결해야 할 과제였고, 매일 같이 터지는 예기치 못한 사건 사고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텅 빈 교실에 앉아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았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교사라는 직업은 참 재밌다. 힘들 때도 많지만, 이게 일인지 놀이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재밌는 순간이 훨씬 더 많다. 적어도 내게 교직 생활은 그랬다.
--- p.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