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나에게 가끔, 예고 없이 누군가가 찾아와 삶의 통증을 덜어내려 한다. 전화가 오고, 메일이 오고, 문자도 톡도 온다. 그리고 우리는 만난다. 부족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서로를 바라본다. 이것이 전부다. 위로 전문가가 아닌 내가 서툴게 위로를 하다가 가끔 그 ‘억지스러운 격려’ 때문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나에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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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후배, 친구, 선배들이 피해자가 되었다고 말할 때 - 또 과거의 기억 때문에 여전히 상처 입고 있다고 말할 때 - 해줄 수 있는 위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말 밖에 남아 있지 않다. “나쁜 놈. 꼭 벌 받을 거야. 우리 오래 살면서 그놈 망하는 거 같이 봐요” 같은 서툰 위로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말은 해줄 수가 없다. 내가 경험해봐서 안다. 시간이 지나도 기억은 쉽게 사라지는 않을 것이고, 기분도 그리 썩 나아지지 않을 테니까.
--- p.43
솔직하게 그냥 다 털어놓을 때, 답이 나오는 순간이 있다. 고민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방향이 틀어지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쉽게 해결책이 나오기도 한다. 정답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오답이 아닌 모든 것이 정답이라는 걸 잊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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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미 나는 ‘어떤 용기’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겨낸 그 순간의 기적이 떠올라 괜찮아질 거라는 희망을 버릴 순 없다. 기적의 순간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로하던 순간이었다는 것을, 결코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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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쓰레기통’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글로 읽기도 했지만, 후배 입에서 그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왜 후배가 슬픈 감정을 꺼내는 그곳이 쓰레기통이 되어야 했을까. 위로를 받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상처를 드러내고 울어버리는 과정이 과연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일까. 친구에게도 터놓지 못하는 우울의 감정은 도대체 언제까지 나 혼자만의 것이어야 하나. 위로받는 법도 잊어버렸고, 위로받을 시간도 잃어버렸다. 쫓기며 사는 삶의 한 귀퉁이에서 잠깐 멈추고 생각해본다. 진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끔은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줄 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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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우울감, 끝이 없는 상실감, 어떤 존재라는 외로움, 인간이라는 근원적 연약함.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이 찾아오는 밤이면 나는 노트북을 연다. 친구의 우울과 가족의 슬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아픈 이야기가 전해지는 밤에도 나는 컴퓨터를 켠다. 펜과 노트 대신에 ‘타닥타닥’ 비명을 질러주는 키보드가 있어서 좋다. 너무 좋다. 그래서 오늘 밤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 p.82
진짜가 아닌 이야기여도 좋다. 행복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좋다. 희망에 가득한 이야기가 아니라도, 때론 절망 가득한 이야기라도 좋다. 살아있다는 것. 우리가 함께 이곳에 있다는 것. 그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 p.158
아들은 잠깐 숨을 몰아쉬는 것 같더니 말했다. “엄마…, 엄마만, 나를 믿으면 돼요.” 아들은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고 했고, 나는 겁이 났다. “동하야. 무슨 일…, 있어? 엄마가 지금 갈까?” “아니에요, 엄마. 괜찮아요. 일하세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아이처럼 눈물이 났다. 다리에 힘이 풀려 구름다리 통로 사이에 주저앉아 버렸다.
--- p.162
이 정도라면 ‘죽어도 좋다’고 자살을 선택할 만큼의 외로움. 그것은 무서운 감정이지만 생각보다 쉽게 우리를 찾아온다. 그래서 나를 믿는 사람을 찾는 일이 얼마나 절박하고 소중한 것인지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경험했고 그래서 잘 알고 있다.
--- p.166
그날 나는 핸드폰에 저장돼 있던 J의 이름을 별명으로 바꿨다. 작가라는 수식어를 빼고 ‘착한’이라는 단어를 이름 앞에 붙였다. 그것은 나 스스로 그녀의 편이 되었음을 공식화하는 나름의 의식이었다.
--- p.200
그럼에도 불면증에서 빠져나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늘의 일’이다. 잠을 자지 못해도 아침이면 일터로 나가 ‘바쁘고 고된 삶’을 살라고 한다. 그런 치열한 태도가 결국 우리를 불면에서 꺼내 줄 구원자다. 아이러니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 p.214
기억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을 때, 나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혹시 누군가 기억을 지워준다고 한다면, 단 한 사람에게만 남기고 다 지울 수 있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그런 일이 진짜 가능하다면, 기억하는 사람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중 누가 더 고통스러울까.
--- p.226
분노가 나를 삼키려 할 때 방법은 하나뿐이다. “당신이 그렇게 하면 나는 아파요”라고 말하는 것. 너의 분노가 나의 감정을 무너뜨릴 수 있고, 너의 태도가 나의 정신을 상처 내고 있다는 걸 알게 하는 것. 이 솔직한 고백 외에는 해결책이 없다. 받아들여 준다면 우리는 함께할 수 있지만, 거절한다면 관계는 종료된다.
--- p.244
사랑이 끝나갈 때 - 아니 어쩌면 이것은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을 것이라 믿고 싶을 때 - 묻고 싶다. 사랑은 어떤 감정에 불과한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육체적 욕망의 대가인지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가끔, 사랑을 일종의 ‘감정’으로만 취급하는 것이 슬프다.
--- p.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