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 뒤에는 주로 이런 단어가 붙어 있었다. 팽배, 창궐, 만연. “행복이 팽배해요”, “기쁨이 창궐해요”, “사랑이 만연해요”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무언가 좋은 것에는 이 단어를 붙이지 않는다. 개인주의에 부정적인 가치 판단이 녹아 있다는 증거다.
---「프롤로그」중에서
대중교통 노선이 꼬여 몇 달을 고민하다 차를 산 동료가 있었다. 그가 부서에서 가장 처음으로 들은 말은 “그 연차에 벌써 차 샀어? 나 같으면 차라리 적금 하나 더 들겠다”였다. 부모님도 하지 않는 씀씀이 타박을 들었다며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신기하게도 나도 같은 듯 다른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자기는 언제까지 뚜벅이 생활할 거야? 나 같으면 차 한 대 뽑겠다.”
---「회사에 개인주의가 팽배한다면」중에서
우리 모두는 동일한 크기와 고유한 생김새를 간직한 퍼즐 조각과 같다. ‘윗사람’이라 해서 특별히 크지 않고, ‘아랫사람’이라 해서 특별히 작지 않은, 올록볼록 튀어나온 부분도 움푹 팬 부분도 제각각 다른 개성 있는 퍼즐. 살아가면서 가족이나 친구, 이웃과 관계를 맺는 것은 바로 그 퍼즐 조각과 조각을 하나씩 이어 붙이는 과정이 아닐까.
---「개인, 고유한 모양새를 지닌 한 조각의 퍼즐」중에서
“혹시 두 분이 나를 싫어하시면 어떡하지?” 내 질문이 잘못되기라도 한 걸까? 그는 가뜩이나 큰 눈을 더더욱 크게 뜨며 말했다. “우리 부모님이 널 싫어하면 너도 우리 부모님을 싫어하면 돼. 나이가 많다고 해서 언제나 옳은 판단만 하는 건 아니잖아. 혹시 우리 아버지가 합당한 이유 없이 너를 싫어한다면, 너도 합당한 이유 없이 싫어해도 되지 않을까? 성인 대 성인으로 같은 위치에서 대하면 돼.”
---「결혼이 개인과 개인의 결합이 되기 위해서는」중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결혼은 상대 집안의 일원이 된다는 뜻이며, 시어머니는 직장의 직속 상사, 며느리는 신입 사원이다’라는 공공연한 인식 속에서 살아 왔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도 스며들었던 그 인식에 문득 의문이 든다. 신입 사원에게도 워라밸이 있는 세상에 어찌하여 며느리는 휴가도 퇴근도 없이 소통을 업무처럼 수행해야 하는가? 우리가 원하는 가족의 모습은 직장 상사와 신입 사원 같은 관계인가?
---「시어머니에게서 엽서가 왔다」중에서
아무리 ‘나의 아이’라 해도 내가 아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부부는 부모의 욕심을 앞세워 아이의 무의식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지 않다는 데 동의했다. 내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지만, 그 아이의 성향과 선택은 나와 또 다를지도 모르니까. 나와 다른 모습의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한다는 개인주의자의 기본 철칙은 아이에게도 해당된다.
---「의사가 되지 않을 권리」중에서
남편과 나는 아이를 낳고 함께 살아가는 일이 ‘개인주의자라서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개인주의자니까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주의자의 육아란 ‘개인의 행복과 만족만을 추구하고 부모로서의 의무와 역할을 거부한다’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서로에게 일정한 역할이 주어진다는 것을 수긍하고, 그것을 균형 있게 분담하는 육아. “그래, 네가 잘할 수 있는 역할은 그거구나. 그럼 내가 이 역할을 해 볼게. 다른 집들은 보통 저렇게 한다지만 우리는 이렇게 한 번 해보자” 하며 조율과 협의에 공을 들이는 육아다.
---「남편이 유치원 미싱 왕이 되었다」중에서
시부모님과의 관계, 부부 관계, 친구 관계가 개인의 삶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모양새여야 하듯, 우리 세대가 만들어 갈 아이와의 관계도 그랬으면 좋겠다. 아이니까, 미성년자니까 보호자 관리가 필요한 게 아니라, 아이이고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어른의 개입이 더 신중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엄마가 계획한 대로 잘 따라와 줘서 고마운 존재’가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자기 삶의 로드맵을 만들어 가는 존재가 되면 좋겠다.
---「아이라는 개인과 파트너로 관계 맺기」중에서
개인주의가 확대되면 공동체가 무너지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결과가 우리를 기다릴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시스템 안에서의 개인은 너무나도 납작했다. 공동체의 유지와 질서라는 대의에 짓눌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의 연대로 쌓아 올린 공동체는 다르다. 개인이 주인된 공동체 속에서 모든 구성원은 동등한 위치에 있으며, 상충되는 이해관계 속에서도 최대한 넓은 합의점을 찾아 나간다. 여기서는 개인을 강조하는 것이 공동체의 근간을 흔들지 못한다. 개인은 공동체를, 공동체는 개인을 보조한다.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