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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거울장난(파란시선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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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거울장난(파란시선 101)

성선경 | 파란 | 2022년 07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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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7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01쪽 | 168g | 128*208*20mm
ISBN13 9791191897234
ISBN10 1191897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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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잠자리 물잠자리가 한 마리
떠내려온 단풍잎에 가만히 앉아서
햇살을 끌어당기는 저 고요
흐르는 물살에는 햇살의 파문
동심원 동심원엔 끝없는 긴장
물잠자리 물잠자리가 끌어당기는
풍경과 풍경 너머의 풍경
물잠자리 물잠자리가 끌어당겨 온
동심원 동심원의 저 고요
그림자 하나 없이 숨죽이는 풍경들
물잠자리 물잠자리가 한 마리
잠시 붉어진 단풍잎에 가만히 앉아서
햇살을 끌어당기는
동심원 동심원의 저 투명한 긴장
개여울도 흐르다 잠시 숨죽인
햇빛 햇빛에
막 피어나는 꽃 한 송이
햇빛고요. ■
---「햇빛고요」중에서

네게 불쑥 건네고 싶은 것 그냥,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가듯 그냥, 아무리 살아 봐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냥, 네게 휙 안겨 주고 싶은 그냥, 고양이처럼 꼬리 치며 안겨 오는 그냥, 사랑이란 것도 때로는 다 부질없다 싶을 때 꺼내 보는 그냥, 발버둥 쳐 봐도 다 알 수 없는 삶 같은 그냥, 봄 햇살 아래 알종아리를 드러내고 싶은 그냥, 야옹거리며 내가 네게로 가는 마음 그냥, 목욕탕이 쉬는 수요일 같은 그냥, 왜냐고 묻지 않는 그냥, 아무에게나 내 속을 털어놓고 싶은 그냥, 한시도 내게서 떨어져 나가 본 적 없는 그냥, 밥 한 그릇을 잘 비운 것 같은 그냥, 우리네 삶의 종착지 같은 그냥, 길고양이 같은 그냥, 그냥 그렇게 산다 싶은 그냥, 불쑥 오늘 너에게 또 건넨다! 그냥. ■
---「그냥」중에서

당뇨에는 효험 있다 그래도 돼지감자는 뚱딴지, 니 잊었다는 말 거짓말, 하마 잊었다는 말 거짓말, 잠시 꿈에 들었단 그 말 거짓말, 이제는 사랑도 옛말이라고 손사래 쳤던 그 말 거짓말, 돼지감자는 뚱딴지, 캐고 보면 뚱딴지, 니 잘 가라 흔들던 그 손 다 거짓말, 손가락 걸었던 그 약속 잊었다는 말 거짓말, 니 잘났다 돼지감자, 캐고 보면 뚱딴지, 나는 단숨에 돌아설 수 있다는 그 말 거짓말, 돼지감자는 잘나도 뚱딴지, 이제는 서로를 놓아주자는 그 말 거짓말, 아무래도 뚱딴지, 벚꽃처럼 분분히 헤어지자 그 말 거짓말, 돼지감자는 뚱딴지, 아무리 잘나도 뚱딴지, 이제 꿈에서 깨어났다는 그 말 거짓말, 그저 다 지나간 봄빛이었다는 말 거짓말, 한순간의 폭풍우였다는 그 말 거짓말, 다 잊었다는 그 말 거짓말, 돼지감자는 뚱딴지 알고 보면 뚱딴지, 니 잊는다는 그 말 거짓말, 하마 잊었다는 그 말 거짓말, 까마귀처럼 새하얀 까마귀처럼 말캉 거짓말, 돼지감자는 뚱딴지. ■
---「돼지감자는 뚱딴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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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시가 오는 몰입의 절정감을 누릴 때조차 일상을 저버리지 않는다. 시가 언어기호로 굳어지는 순간 미처 호명해 주지 못한 눈짓들이 망각 너머로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소리와 뜻과 명징한 이미지가 트라이앵글처럼 합일적 복합체를 이루어 공명하는 시편들에서도 느껴지는 긴장은 시를 간섭하는 일상의 자잘한 소음들에 대한 경청의 자세로부터 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잠시 내가 한눈을 팔았다 싶을 때/찰칵, 가로등을” 켜고 끄는 그들이야말로 성선경 시의 요정들이 아닌가 한다(「등불, 등」). 세계의 비밀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기도 하지만, 그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애써 한눈을 파는 것이 예나 이제나 늘 너그러웠던 품성의 시인이 자신도 모르게 예각화한 방법론이다.

몰입과 방심을 두루 지닌 시편들이 어디에서 연원하는가를 살펴보니 제 발을 잘라먹고 ‘궁(窮)’을 견디는 문어의 외로움과 만나게 된다(「궁」). 궁핍과 외로움을 먹물 삼아 쓴 시편들이 문어 흡반처럼 붙어서 생생한 실감으로 떨어지질 않는다고 하면 어떨까. 마산 어시장에서 막 올라온 그 유연하고도 능청스러우며 강력한 흡반들이 “환갑 진갑 다 지나 이젠 여기가 끝, 했을 때/나는 동산바치/꽃 화분 서른한 개가 내 앞에 있”다고 노래하는 「늙은 원예사」의 비루와 소멸의 징후들을 새뜻한 재생의 경이로 전환시키고 있다. 심심한 일상을 카랑카랑한 백척간두로 절대 무한을 살고자 하는 시의 꿈이 지금, 여기를 아득한 지평으로 열어젖혔다. “햇살을 끌어당기는/동심원 동심원의 저 투명한 긴장”을 품은 「햇빛고요」에 나도 물잠자리처럼 젖은 날개를 널어 말려 봐야겠다.
- 손택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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