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해를 지키는(守歲) 날
벅차게 솟아오르는 감흥으로
날밤을 꼬박 새운 이들

잔설이 덕지덕지 얼어붙어
흑룡의 등짝 같은 비탈길을
잎꾼개미 줄을 잇듯 올라간다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에
기도 발 좋은 자리를 찾아
숨 가쁘게 오르는 산상(山上)에는

날 선 한기(寒氣) 송곳 되어
볼을 찌르는 매서운 삭풍에도
동녘을 향해 선 모아이 진상들

태초의 어둠으로 빚은 그들은
검은 궁창의 차양막을 걷어내고
넋이 춤추는 환희의 불꽃을 기원하는데

대지의 힘찬 맥박 소리에 맞춰
동공에 지펴지는 초신성의 불씨
마음 심연에 옮겨 심는다

공허한 마음 밭에 불꽃이 피고
비루했던 육신이 데워지면
산상의 동토에서 해바라기 꽃을 피운다
---「산상 일출」중에서

산수유 여린 꽃망울을
감도는 노란 휘파람 소리
방풍 비닐이 떨고 있다

두꺼운 껍질을 벗겨내고
덧난 상처에 소금 뿌리는
고통의 함성 가까울수록

그리운 이는 그리운 만큼
사랑한 이는 사랑한 만큼
미움을 버리라고 흔들린다

햇살 따뜻한 삼월에 마음
에이는 살바람 부는 것은
산 그리메 꽃이 되자는 것이다
---「삼월에 부는 바람」중에서

잠에서 깨어나
아침 마당으로 들어서면
한시도 진득하지 못하고
감정의 골짜기를
오르내리는 너

생각의 문을
막고 어깃장 놓으며
하고 싶은 의식을
송두리째 빼앗는 너는
어쩜 그리 애물단지인 거냐

신중한 선택의
시점에 서 있을 때면
애증의 영역을
동시에 판단해야 하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너

있는 그대로
자유롭고 싶은 나를
울먹이게 한 너는 누구인가
리트머스 시험은 끝내자
진솔한 사랑을 노래 부르자
---「내 안의 너에게」중에서

마음 심란하고 생각이 허접하여
갈길 잊고 서성일 때면
또렷이 생각나는 길이 있습니다

옹기 항아리 머리에 이고
동네 우물물 길어 나르던 어머니
“엄니! 물 길어 올까?” 하였더니
“고맙지만 나가 친구하고 놀아라” 했습니다

너덜너덜 낡은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 매고
보리 까시락이 풀풀 날리는 도리깨질 할 때
“나도 해볼래, 도리깨 주세요” 하였더니
“아서라 방에 들어가 공부나 해라” 했습니다

물 빠진 검은색 몸빼바지를 입고
가리나무 한 짐 짊어지고 내려오던 산비탈에서
“내가 짊어지고 갈게” 하였더니
“네가 할 일이 아니다” 했습니다

앞이 훤한 민둥산에는
박새도 집을 짓지 않는단다
계곡이 없는 산은 산이 아니니라
네가 갖추어야 할 길이 따로 있고
내가 갈 길이 따로 있단다
애써 네 할 일 열심히 하거라

그런 길이 있었습니다

<b>■ 시인의 말</b><br/><br/>“나이 들어서는 엄벙덤벙 사는 거야. 이것저것 따지며 소심하게 지내지 말고 재미나게 보내야 하네.”<br/>정년퇴직 후 의기소침해 있던 나에게 작지 않은 회사를 경영하는 선배가 사무실에 자주 놀러 오라고 했는데, 폐(弊)가 될 것 같아 가지 않았더니 정색하며 하신 말씀이다. <br/><br/>용렬하지 못한 나의 처신에 대한 충고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타고난 천성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선배의 사무실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빈둥거리며 지냈다.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이런 것을 절필이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br/><br/>시간은 덧없이 흘러 칠순이 되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제대로 탈피하지 못한 생활에 후회할 것 같았다. 가치 있는 것을 실천하는 지혜로운 삶을 위해, 손자에게 틈틈이 사자소학(四子小學)을 가르치며, 여기저기 끄적거려 놓은 습작을 주섬주섬 모아 보았다.<br/><br/>2022년 가을날, 玉岡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