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10월 10일 김가진 일행은 임시정부의 교통국 이륭양행을 경영하던 조지 쇼의 도움을 받아 만주 안동(단둥)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1919년 10월 29일 조선민족대동단 총재 김가진이 임시정부에 도착하자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모든 요인이 큰절로 예를 표하며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는 대한제국의 대신으로는 유일하게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것입니다. (…) 임시정부에 합류한 김가진은 대담한 항일 프로젝트를 준비했습니다. 임시정부에 큰 힘을 실어줄 또 다른 인사의 망명을 추진한 것입니다. 바로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순종의 아우인 의친왕 이강의 망명이었습니다. 김가진은 황위 계승 서열에서 순종 다음인 이강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한다면 일본은 큰 충격을 받을 것이고, 임시정부의 정통성 확보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그는 의친왕 이강과 김가진 등의 이름으로 제2차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 국내외 관심을 고조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 김가진, 버림받은 애국자
--- p.24~25
그는 친일 행위를 하면서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사이에서 엇갈린 평가와 논란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 이종욱은 친일 행각에 동분서주하다가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8월 17일 기존에 맡고 있던 모든 직책에서 사퇴했습니다. 이후 9월 22일에 소집된 전국 승려 대회에서 부일 협력자 제1호로 지목되어 승권 정지 3년이라는 징계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광복 직후 “이종욱의 자금 조달이 없었다면 임시정부가 유지될 수 없었다.”라고 말한 김구의 증언이 나와 이종욱의 친일 행위가 ‘자발적이냐, 위장이냐’라는 논쟁이 벌어지는 데 영향을 준 것입니다.
(…) 이종욱은 일제 강점기 동안 독립운동한 것을 인정받아 1977년 건국훈장(3등급)이 추서되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친일 행적이 확인되어 2011년 서훈이 취소되었습니다. 후손들은 ‘친일 행적은 독립운동을 위한 위장’이라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보훈처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행정 소송에서도 패소했습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인 이종욱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는 독립운동가인가요? 아니면 친일파인가요?
- 이종욱, 독립운동가인가? 친일 승려인가?
--- p.63~65)
중국 신문 기자 출신으로 글이라는 매체의 묘한 매력을 알고 있던 그는 임시정부에서 글을 쓰는 곳이라면 어디든 참가했습니다.
그중 임시정부가 한국 독립운동사를 정리하기 위해 임시사료 편찬위원회를 설치해 한국 독립의 이론적 근거를 만들고 일본의 침략 사실과 한국 역사의 우수성을 외국 파견 특사에게 설명하기 위해 《한일관계사료집》을 편찬했는데 이 작업에 조동호도 동참했습니다.
조동호가 능력을 마음껏 발휘했던 분야는 따로 있었습니다.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신문〉은 창간 당시 한글 활자가 없었는데 조동호가 성경의 한글 자모를 하나하나 떼어내 직접 활자를 주조한 것입니다. (…) 만약 조동호가 없었더라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배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활자 문제를 해결하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신문에 글을 쓸 인재가 마땅치 않았던 겁니다. 이번에도 조동호가 나섰습니다. 그는 철혈, 냉열, 철묵, 묵망, 첨구자 등 여러 필명으로 〈독립신문〉에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항일 논설을 실었습니다.
- 조동호, 칼 대신 펜을 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 p.111~113
김철은 고향에서는 무의미하게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형제들에게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밝혔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처지는 내일의 일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유산인 농토를 팔아 독립 자금으로 쓰겠습니다.”
이번에도 형제들은 그의 제안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상의 끝에 집안 토지를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김철뿐 아니라 그의 형제들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식민 통치에 협력하라는 조선총독부의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으로 국내에서 생활이 어려워지자 김철은 고향으로 돌아온 지 2년 만인 1917년에 상하이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상하이에 도착한 김철은 김규식, 여운형, 장덕수, 선우혁, 서병호 등을 만나면서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을 키워나갔습니다.
- 김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적 소유자
--- p.144
초기 임시정부를 운영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과 실무를 담당했던 김철은 임시정부 청사의 법적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1919년 4월 17일 임시정부 청사를 이전할 때 대부분의 경비를 김철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전라도 지방 유지들에게서 모금한 자금으로 해결한 터라 상하이 마랑로 보경리 4호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를 김철의 명의로 임대한 것입니다. 또한 김철은 재정을 다루는 데 능하고 상하이에 오래 거주하면서 중국 사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김철의 생가 터에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역사관이 세워진 이유입니다.
- 김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적 소유자
--- p.149
‘파란만장’이라는 단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김홍일의 일생이 아닐까요? 중국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 애 먹던 중국 군관학교 학생을 시작으로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끌고 러시아 내전에 참여했고, 중국군 소속으로 북벌과 중일전쟁을 치르면서 장군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또한 임시정부의 한인애국단과 한국광복군을 지원했고, 해방 이후에는 다시 중국군에 돌아가 한인들의 순조로운 귀국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어렵게 귀국한 후에도 대한민국 국군을 건설하는 등 조국을 위해 기구하고도 사연 많은 평생을 살았습니다.
김홍일 장군의 분투를 귀감으로 삼으면서 수많은 항일 독립운동가의 노력과 희생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김홍일, 한중 진영을 넘나들며 일본과 싸우다
--- p.201~202
백정기는 살아생전 세 번의 의거를 시도했습니다.
첫 번째 시도는 1923년 히로히토 천황 암살이었는데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는 바람에 급히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미완의 의거는 그로부터 9년 뒤 이봉창이 다시 시도했습니다. 두 번째 시도가 훙커우공원 의거였습니다. 이쯤 되면 백정기와 한인애국단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시도는 육삼정 의거였습니다. 1933년 3월 17일 상하이의 고급 식당 육삼정에서 당시 상하이 주중 일본 공사 아리요시의 암살을 시도한 것입니다. (…) 몇 차례 예행연습을 마친 후 거사 당일 저녁 류자명 의장이 마련한 송별회에 열한 명의 동지가 모였습니다.
“동지들, 저승에서 만납시다.”
간단한 작별 인사를 남긴 백정기와 이강훈은 계획대로 연회가 열리기 전 육삼정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의거를 위해 준비했던 무기 또한 죄다 압수당했습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에 일본 경찰이 심어둔 밀정, 즉 스파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삼정 의거 실패로 체포된 백정기는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상고를 포기하고 복역하다가 폐병이 악화되어 복역한 지 1년도 채 안 된 1934년 6월 5일 서른여덟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 백정기, 미완에 그친 의열 투쟁의 주인공
--- p.218~221
한인 학병 탈출 1호 한성수의 합류는 한국광복군 내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일본 최고 교육을 받은 엘리트가 일본군의 앞잡이가 아닌 강제 동원되자마자 탈출해 한국광복군을 찾아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성수의 합류 이후 학병 출신들이 연달아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고무된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는 학병들에게 군사 교육을 시키고자 한국광복군 군사훈련반을 설치했습니다.
꿈에 그리던 한국광복군에 입대한 한성수는 한국광복군 군사훈련반 1기생으로 입교해 교육과 훈련을 받았습니다. 5개월 동안 군사?훈련?정신?학교 교육을 받은 48명의 교육생은 졸업 후 한국광복군의 초급 장교로 거듭났습니다. 당시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성수는 뛰어난 신체 조건과 음악적 재능, 열정적이면서도 후덕한 인품, 카리스마 있는 지도력 등을 지닌 누가 봐도 멋진 청년이었습니다.
- 한성수, 학병 탈출 1호 한국광복군
--- p.265~266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임시정부 요인 중에서 가장 뜨거운 학구열을 가진 인물을 꼽는다면 저는 주저 없이 이복원을 선택할 것입니다. 1914년 6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후의 이복원 행적은 잘 찾을 수 없습니다. ‘윌리엄?이라는 이름으로 1916년 6월 클레몬트 근처 업랜드관립소학교를 졸업했고,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인국민회와 각종 동포 행사에 적지 않은 기부금을 냈다는 기록을 통해 캘리포니아주 남부 지역에서 노동과 학업을 병행했을 거라고 추정할 뿐입니다.
이복원이 미국에서 소학교(오늘날의 초등학교)를 졸업했을 때의 나이는 무려 30대 중반이었습니다. 심지어 온타리오중학교로 진학해 1920년 6월 졸업할 때의 나이는 마흔 살이 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 이복원의 학구열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는 중학 과정을 마친 후 1920년 9월 7일 미국 동부 버지니아주 렉싱턴으로 떠났습니다. 그곳에는 1839년 설립된 미국에서 가장 역사가 긴 주립 군사 대학 버지니아군사학교(VMI)가 있었습니다. 이복원은 더 높은 교육을 받고자 새로운 곳으로 이주했던 것입니다.
- 이복원, 학구열에 불탄 미국 영감 군사 전문가
--- p.292~293
3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예순여섯 살의 이복원은 분단으로 북쪽 고향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해방 이후 이미 고령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꿈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기(중국)에서 생각할 때 귀국하면 국군에 가담하여 이 한 몸을 나라에 바칠 각오를 하고 왔는데 시기가 좀 빠른 모양인가….”
해방된 조국에서 군인이 되고 싶었지만 그 꿈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대신 귀국한 한국광복군 동지들이 직장을 구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군인처럼 보이지 않는 온유한 인상의 소유자였을 이복원은 조국 독립에 도움이 될 선진 학문을 끊임없이 탐구하다가 마흔 살이 넘은 나이에 중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12년간 군사 전문가로 활동했습니다.
가족도 없이 독신으로 살다가 6.25전쟁 중 실종된 이복원. 평생을 한국의 군인으로 살기 위해 그 누구보다 뜨겁고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그를 다시 한 번 조명해봐야 되지 않을까요?
- 이복원, 학구열에 불탄 미국 영감 군사 전문가
--- p.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