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처럼 투명한 수채화의 작가’로 불리는 이와사키 치히로는 도쿄에서 여교사와 건축기사의 3자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20살에 데릴사위를 얻어 결혼식을 올렸으나 아무리 해도 상대를 사랑할 수 없었고, 마음약한 남편의 자살로 1년도 못되어 결혼생활이 막을 내렸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침략전쟁의 실태를 앎에 따라 가해자의 입장이었다는 죄의식에 괴로워하였다. 그런데 이 두가지 사건, 즉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상대를 깊이 상처 입혔다는 것, 또 자신의 혜택받은 생활 뒤엔 많은 타국민들의 괴로움이 있었다는 자각을 계기로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까지의 인생과 결별하여 괴로움과 슬픔 모두를 받아들이는 삶을 결심하게 된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은 이와사키 치히로는 자력으로 살아나간다는 기쁨을 지닌 채, 당시 공산당 기관지였던 인민신문의 기자를 하면서 고아원이나 보육원의 뜰에 앉아 틈틈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첫 작품인 <어머니의 이야기>서부터 시작해 그녀는 평생 어린이만을 작품의 테마로 삼았는데, ‘손 인형’ 모델 없이도 10개월 된 아이와 12개월 된 아이를 구분하여 그릴 정도로 관찰력과 데생력이 뛰어났다. 때문에 서양의 수채화와 동양의 수묵화를 독창적으로 결합한 그녀의 화집은 최소한 10개국 이상에서 동시 출간될 만치 호평과 극찬을 받았으며 73년엔 『작은 새가 온 날』로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그래픽 대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화집으로는 『비오는 날 집보기』,『작은 새가 온 날』,『전쟁 속의 어린이』 등이 있는데,『전쟁 속의 어린이』는 치히로가 병상에서 완성을 서두른 작품으로 전쟁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갖고 베트남 전쟁에서 어린이들이 겪는 비극에 대해 조용하면서도 강인하게 호소한 작품이며, 『비오는 날 집보기』는 처음 혼자서 집을 보게 된 소녀의 미묘한 마음의 흔들림을 최소한의 언어만으로 표현한 일종의 시화집이다. 훗날 역시 공산당 소속이었던 인권변호사와 결혼한 그녀는 인권운동을 하는 남편을 대신하여 평생 생계를 책임졌고, 74년 55세에 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그림이 2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사랑을 받는 이유는 단지 언뜻 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아름답고 푸근한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인생의 고단함과 슬픔 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인간애가 녹아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감싸주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치히로가 세상을 떠나고 3년이 지난 1977년, 그녀가 살던 집을 개조하여 도쿄의 치히로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동양에서는 최초의 그림작가 미술관이기도 한 이 곳에는 8500여 점에 이르는 치히로의 그림들이 소장되어 있으며, 『창가의 토토』의 저자인 구로야나기 테츠코가 현재 미술관장으로 있다. 그리고 97년엔 나가노의 아즈미노에도 또 하나의 치히로 미술관이 개관했는데, 이 곳에는 치히로가 생전에 좋아했던 케테 콜비츠의 원화를 비롯하여 그림책 박물관이 설치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