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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걷힌 자리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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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걷힌 자리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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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2월 21일
쪽수, 무게, 크기 416쪽 | 512g | 135*205*25mm
ISBN13 9788965964988
ISBN10 8965964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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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 한마디

[경성의 기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격변의 시대, 경성의 미술품·골동품 중개상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어둠이 걷힌 자리엔』은 동명의 웹툰을 작가가 직접 각색한 소설로, 풀리지 않는 고민을 안은 인간과 영물, 신과 원혼의 사연을 그린다. 소설책에는 원작에 없는 부분을 서장에 함께 실어 이야기의 깊이를 더했다. -소설 MD 박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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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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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님은 응접실 소파에 허리를 세우고 앉아 벽면마다 전시된 골동품과 미술품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창백한 피부, 초승달 같은 눈썹, 가늘고 길게 빠진 눈꼬리, 참빗으로 곱게 빗어 넘긴 올림머리가 꼭 미인도를 연상케 했지만 갸름한 턱 선이나 오묘하게 찢어져 올라간 입가가 보통의 미인도의 푸근함과는 다른 인상을 만들었다. (…) 사람의 모습을 흉내 낸 것일 텐데 요즘 경성에서 유행하는 차림새는 아니니 지방에서 오셨으려나? 손님은 두겸이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알았는지 먼저 입을 열었다.
“제 소개를 하자면… 인간이 붙인 이름 중에서는 토지신이 가장 그럴듯하겠군요.”
사근사근한 말투다.
“자연의 영물은 본래 인간에게 무관심한 편이지요. 헌데 그런 우리 사이에서도 당신은 유명하더이다.”
종종 눈앞의 손님과 같은 존재가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거나 문제 해결을 부탁하는 경우가 있곤 했다. 그럴 때 두겸은 그저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뿐인데, 그 같은 두겸의 이야기가 손님 같은 존재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져나간 모양이었다. --- p.25~26

* 후우. 두겸은 심호흡을 했다. 삽을 들고 혼자 손님의 텃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건 여러 사람이 겪지 않아도 될 일이다. 특히 이 장소를 집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은 목격할 필요 없다. 푹, 푹. 텃밭을 파헤치는 삽질엔 의욕이 없었다. 두겸은 이 아래에서 자신이 발견할 것이 무엇일지 알고 있었다. 만개 하다 못해 이제는 극성을 부리는 것만 같은 흰 꽃들 사이, 시들어 버린 덩굴 아래, 새카만 흙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철의 시체였다. (…) 두겸은 비틀거리며 텃밭에서 나와 여관 툇마루에 주저앉았다. 오래전 그의 도움을 받은 마을신이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겁줄 때 말을 듣지 않으면 괴물이 잡아갈 것이라고 하지. 그런데 말야. 진짜로 있어. 나쁜 아이들을 잡아가는 귀신이. 그것은 사람들의 염원을 듣고 와.
-말도 안 돼요.
당시 두겸은 그렇게 대답했었다.
-귀신이 누구 좋자고 나쁜 아이들을 골라 잡아갑니까?
히히히히. 마을신은 웃었다. 그리고 두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귀신 좋자고 잡아가지. 왜냐하면 그런 아이들은 사라져도 아무도 찾지 않으니까. --- p.100~101

* 소년은 우물 앞에서 감당하지 못할 감정에 북받쳐 한참을 울었다. 주변의 나무와 풀과 바위의 경계가 선연해질 때쯤 몸을 일으켰다. 우물은 그대로 거기에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귀신 잡아먹는 우물일 수 없었으나 마을 사람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소년은 살아 있었으나 마을 사람들에게도 엄마에게도 살아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나는 다시 태어난 거야. 이제 내게 고향은 없다.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지만 그 또한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꿈속에서 본 듯한 그 초록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이곳에서 기억할 것은 그것뿐이다. 치조라고 했던가.
치조. 그 이름을 잊지 말아야지.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 아니,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나는 소년의 머리 위로 흰 목련 꽃잎이 떨어져 내렸다. --- p.129~130

* 두겸이 오월중개소로 돌아왔을 때 눈에 익은 윤곽이 응접실 소파에 무사처럼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있었다. 새벽의 문제적 방문객, 담비였다. 허. 올 때마다 전략이 발전하고 있잖아? 처음엔 동 트기도 전에 집으로 들이닥치더니 이젠 업무 시간에 직장으로 찾아올 줄도 알고? 이쯤 되면 감탄이 나온다. 그러나 발전하는 전략과 달리 인간의 행색만 겨우 갖춘 외형은 그대로다. 키는 두겸의 허리 정도, 어린아이의 얼굴이긴 하나 귀는 꼭 주전자에 달린 손잡이처럼 큼지막하고 입은 쭉 찢어졌으며 눈은 부리부리하다. 제 딴에는 사람으로 둔갑했다고 굳게 믿는 모양이지만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담비는 담비였다. 아직 둔갑술이 능숙하지 않거나 아니면 정말 이 녀석 눈엔 인간들이 저렇게 보이는 걸까? 두겸은 웃음이 툭 튀어나왔다. --- p.149

* 아아. 두겸은 아이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온내의 갈 곳 모를 화와 혼란이 깃든 굳은 눈매를 잘 알았다. 그것은 우물에 던져져 죽은 어린 동생의 기억과, 역시 우물에 던져져 죽다 살아나며 얻은 능력을 감당하기 어려워 방황하던 십 대, 이십 대의 자신과 닮아 있었다. 이 아이는 아마 앞으로도 이 마음의 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가벼워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절대 사라 지지 않을 것이다. 방황하던 두겸이 보통 사람들은 보고 들을 수없는 것을 보고 듣는 능력을 이용해 영물들과 귀신들, 산 사람들을 돕기 시작하면서, 하나 둘씩 좋은 인연들을 만나면서 그 짐을 감당하는 법을 조금씩 터득했지만 완전히 자유로워지진 못한 것처럼. --- p.201~202

* 흐~으음. 치조가 천천히 눈을 굴렸다. 샘은 다정한 인간을 조심해야 한다지만 치조가 보기에 조심해야 하는 건 다정한 인간 본인이다. 분명 덕재란 자는 다정한 인간일 것이다. 그래서 육신에 남아 있던 다정함이, 그 육신을 홀라당 뒤집어쓴 샘물에게 들어가버린 게 분명하다. 샘물은 다정한 인간 때문에 소멸한 게 아니라 다정해서 소멸했다.
치조는 두겸이 우물에 버려졌을 때를 생각했다. 그때 두겸은 정말 작았다. 지금도 작지만 그때는 콩알만 했다. 우물에 던져진 사람들, 두겸의 동생, 그리고 치조를 가여워하며 펑펑 울던 자그마한 아이.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때 아이는 다정했기 때문에 우물에 던져졌을 것이다. --- p.237

* 무엇이, 누가 이런 상황을 지속되게 하는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피해자들의 삶은 어찌해야 하나. 결국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면 나는,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은 왜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우리는 왜 분노하는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의 피해자이기도 했던, 그러나 생존자이기도 한 두겸 역시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두겸은 동생을 죽인 마을 사람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지금 지옥의 아귀들에게 매일 내장을 뜯어 먹히는 고통을 반복하고 있다고 해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용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두겸은 옅고 길게 숨을 쉬었다. 떨지 않으려고 양손을 움켜쥐었는데도 자꾸 떨렸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원혼들이 자신을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위협적인 압박이었다. 두겸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하지만 영원히 상처 속에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어요.”
술렁술렁. 주변이 들끓었다. --- p.301

* “저건 함박꽃나무예요.”
여자가 말했다. 치조에겐 이름이 모두 다른 아이들인데 여자 에겐 전부 함박꽃나무였다. 조선 각처의 깊은 산 중턱 골짜기에 주로 서식하는 ‘미나리아재비목 목련과의 낙엽소교목’이란다. 치조와 여자는 같은 대상을 다른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정말로 뭔가 바뀌고 있구나.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우리 모두 휩쓸려 가. (…) 생각에 잠긴 치조의 의식 뒤쪽으로 여자의 말이 웅웅웅 뭉개졌다. 치조는 눈을 들어 현실 너머 태고의 생명을 머금은 산과 그 기운을 받은 영화로운 짐승들과 그들이 누렸던 시간을 본다. 치조가 알던 세계는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치조를 덩그러니 남겨두고.
---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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