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와 후서 모두를 연구해 보면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인 되기 이전에 몸담고 있던 문화의 특성들 가운데 많은 부분을 그들 의 교회 생활에 그대로 가지고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새로워지고 성화되는 과정 속에 놓여 있다. 여기서는 옛 삶의 모습들도 나타나고 새 삶의 모습들도 나타난다. 어떤 작가는 이런 상황을 바깥 추운 곳에 있다가 따뜻한 방 안으로 들어온 한 사람의 모습에 비유한다. 방 안의 따뜻한 열기의 영향 속에 이미 들어와 있지만, 이 사람 속에는 바깥 추운 곳에서 가지고 온 얼음이 곳곳에 남아 있을 수 있다. 따뜻한 열기가 결정적 영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운 곳의 흔적이 여전히 상존하는 것이다.
--- pp.21~22
우리는 고린도후서가 바울을 하나의 사람으로, 그것도 요동치는 감정과 내적 갈등에 의해 찢긴 한 인간 존재로 그리고 있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서신은 바울을 이상화된 모습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이며, 동시에 깨어지기 쉬운 한 인간 존재이다. 때로 우리는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결코 종이나 나무로 만들어 놓은 성자가 아니라, 살과 피를 가진 그리스도의 종일 뿐이다. 그들의 생각과 감정과 행위는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 p.35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선의 것을 주시기를 원한다면 그분께서 알아서 우리를 위한 최선을 이루어주실 것이니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에드가 브라이트맨(Edgar Brightman)은 이런 논리를 세밀하게 검토한 후에 ‘최선의 것’이 꼭 정해져 있거나 추상적인 형태를 띠는 것은 아니라고 답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기도할 때 얻는 최선의 것은 기도하지 않을 때 얻는 최선의 것보다 더 좋다.” 브라이트맨 은 기도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원하시는 “최선의 것”의 일부가 되는지를 보여주면서, 기도하는 공동체의 역할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 공동체는 온 세계를 위해 자비의 마음을 품고 탄식하며 간구한다. 바울은 “많은 사람의 기도”를 언급하고 있다. 기도가 없이는 ‘최선의 것’도 있을 수 없다. 바울은 또한 많은 사람들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돌려드리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 p.52
바울은 이 사람에게 준 벌이 충분하다고 말한다(6절). 따라서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권면한다(7절). 벌을 주더라도 너무 지나치게 슬픔에 빠지게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이 사람이 받은 “벌”은 아마도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교제로부터 축출되는 벌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아마 오늘날의 교회 출석이나 헌신도에 대한 오만한 자세를 가진 어떤 사람들과 비슷하게 이것이 어떻게 벌로 여겨질 수 있느냐 할 수도 있다. 철저하게 비기독교적인 문화권 속에서는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교제는 너무나 깊고 친밀한 것이었다. 고린도의 교인들은 문제를 일으킨 이 사람과 교제를 단절했지만, 이제는 사랑을 그 사람에게 나타내어야 할 때이다.
--- p.68
바울은 “그러므로”(헬, 디아 투토)라는 말로 이 단락을 시작한다(1절). 이는 바로 앞에서 말한 내용을 받고 있다. 성령께서 참 사도의 사역을 이끄시고 힘 을 주시기 때문에, 또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며 지속적인 변모를 이루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는 “낙심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퍼니쉬는 이를 “뒤로 물러나다”(헬, 엥카쿠멘)로 번역한다. 엥카케오라는 동사는 ‘악한 것에 굴복하다’(로버트슨, ‘악한, 나쁜’을 의미하는 헬라어 카코스에 근거하여), 또는 ‘용기를 잃다, 지치다, 의욕을 잃다’(트롤), 또는 ‘원하는 활동을 계속하는 데 필요한 동기를 잃다, 두려워하거나 낙심하다’(단커) 등의 의미가 있다.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많은 격려를 필요로 하는 상황 속에서 오히려 낙담하거나 용기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요청하고 있다. 참 사도나 그리스도인 사역자는 일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 p.95
믿음은 맹목적으로 흑암 속에 뛰어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자기 것으로 삼는 적극적인 전유의 자세를 가리킨다. 나는 다른 곳에서 신약에 나타나는 “믿음”이라는 용어를 열세 가지의 다른 의미로 구분해서 정리한 적이 있다. 때로 믿음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적극적인 신뢰를 의미한다. 마틴 루터는 믿음을 이렇게 정의한 적이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살아 있는 그리고 과감한 확신이다. 그것이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거기에 걸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 확신은 …… 사람을 기쁘게 하고 담대하게 하며 행복하게 만든다.”
--- p.121
고린도의 거짓 사도들은 소위 ‘번영 복음’을 내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 은 재정적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이나 인정의 징표로 보았을 것이다. 퍼니쉬는 바울의 가난이 고린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실패’로 보였을 것이며, 따라서 이것이 그의 사도적 권위를 부정하는 빌미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잘 지적한다(참조, 고전9:1-18, 고후11:7-11). 그들은 바울이 “아무것도 없는 자”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을 들을 때 자기들의 생각이 옳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뒤집는다. 그들이 그리스도께 속할 때 모든 것이 그들의 것이 된다(참조, 고전3:21-22).
--- pp.142~143
14절에서 바울은 고린도의 상황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게 되리라고 디도에게 자랑하였다는 것을 밝힌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자랑하거나 자부심을 표현하는 것을 전혀 거리낄 필요가 없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이룬 일에 대해서는 자랑하기를 삼간다. 고린도에서의 상황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결과를 낳았더라면 그는 많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바울이 디도와 함께 고린도를 걱정하고 서로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은 그가 항상 동료 사역자들과 협력하여 일하는 사람임을 잘 보여준다. 그는 결코 고립된 외톨이가 아니다.
--- pp.162~163
바울은 9절에서 마게도냐 교회들이 보인 사랑의 예보다 더 근원적인 모범을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좀 더 시간 이 흐른 뒤에 그가 빌립보서 2:5-11에서 말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신 분이시지만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고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다. 크리소스토무스가 지적하는 것처럼, 가난함이 부요함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통해 확증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사렛 예수의 삶 속에서 가시적으로 구현되었다. 이 은혜를 누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관대함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 pp.171~172
칼 바르트는 그의 책 『죽은 자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the Dead)』에서 고린도전서 1:31을 매우 탁월하게 해설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결점은 …… 그들의 믿음에 함유된 담대함과 확신과 열정이다. 다만 이것이 하나님께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다고 생각하는 믿음, 그리고 특정 지도자들이나 영웅화된 인물에 기반을 둔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실상 그들은 믿음을 몇몇 구체적인 인간 경험이나 신념, 사상, 이론 같은 것들과 혼동하고 있다.” 바르트는 또한 이렇게 덧붙인다. “이에 맞서서 바울이 울리는 경종의 나팔은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3:21)는 것이다. 좀 더 긍정적인 형태로 바꾸어서 표현하자면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1:31 [또한 고후 10:17])는 것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of God [1:30])를 말하는데, “이것이 분명 이 모든 단락의 숨은 근원이다.”
--- p.206
오늘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정규적인 사역의 현장에서도 우리의 사역이 질병이나 그 밖의 원치 않는 상황들로 때로 위기를 맞는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쉽게 원망이나 불평에 빠지고는 한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상황들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제시된 바울의 목록을 로마서 8:35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위기나 괴로움의 상황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 없다. 바울은 이 모든 괴로움들을 “그리스도를 위하여”(헬, 휘 페르 크리스투) 달게 받아들인다. 헬라어 전치사 휘페르는 소유격으로 쓰인 경우 누군가의 이익을 가리키는 의미를 나타낸다. 바울의 고난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유익과 기회를 위한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것은 그의 고난의 목록이 자기중심의,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목록이 되지 않게 하는 것으로서 중요하다. 바울이 그의 약함을 자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행하는 일이다. 퍼니쉬가 잘 지적하는 것처럼,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의 사 도적 대행자로서 그리스도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다.”
--- pp.230~231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삶 속에 살아계신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입증되어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이 인정받기를 소망하고 있다(6절). 고린도 교인들의 경우도 그들의 진정성이 입증되려면 그들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야만 한다. 바울은 이런 상황을 기회로 삼아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살아 계시고 그들 가운데서 능력이 있으신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6절의 표현은 “비관적 성격을 띠기보다는 역설의 성격을 띤다.” 과연 고린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스스로를 입증할 수 있을 것인가?
--- p.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