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나는 삼엽충을 발견했다. 그 암석은 그 동물을 사이에 두고 쩍 갈라졌다. 마치 일종의 계시인 듯했지만, 사실은 화석 자체가 암석을 약하게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해 마치 폭로되고 싶어하는 양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반으로 갈라진 암석 두 조각을 손에 들고 있었다. 왼손에는 그 동물 자체가 박힌 채 볼록 튀어나온 반쪽이 들려 있었고, 오른손에는 나머지 절반이 있었던 오목한 주형이 담긴 반쪽이 들려 있었다. 양쪽은 서로 꽉 껴안은 채 변화무쌍한 수억 년의 세월을 묻힌 상태로 살아남았다. 화석에는 갈색 얼룩이 하나 있었지만, 내게는 결코 흠이 아니었다. 내 손에 쥔 것은 살아 있는 교과서였으니까. 그림과 사진은 오로지 혼자만의 것인 양 자기 본위의 충만감을 불러일으키는 소년시절의 발견의 기쁨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것이 내 인생을 바꾸게 된 동물을 처음 발견한 순간이었다. 삼엽충의 길고 가느다란 눈이 나를 응시했고 나도 마주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 어떤 푸른 눈동자보다 더 압도적인 인상을 심어주었고, 5억 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전율을 느끼게 했다. --- pp.35~36
어떤 생물도 생물권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으며, 삼엽충도 마찬가지다. 삼엽충의 역사도 그들이 목격한 사건들을 통해 형성되었다. 문외한들이 멸종한 ‘벌레’를 연구하는 일에 평생을 바친다는 것이 가능하구나라고 놀라움을 드러낼 때, 나는 그들에게 지난 수천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지 생각해보고, 수천만 년을 다루는 역사가는 어떠할지 상상해보라고 한다. 미끼를 끼운 낚싯줄을 몇 번 던지면서 바다 전체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낚시꾼들처럼, 우리가 얻을 지식은 미미한 수준에 그칠 것이다. 오래전에 사라져서 아무도 자세히 모를 그런 생물집단을 평생 연구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해 할 사람에게 내놓을 확실한 답이 하나 있다. 삼엽충은 무려 3억 년 동안, 거의 고생대 내내 존속했다. 늦깎이로 등장한 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들에게 ‘원시적’이나 ‘성공하지 못한’이라는 꼬리표를 붙일 수 있단 말인가? 인류가 산 기간은 그들이 산 기간의 0.5퍼센트에 불과한데. --- p.38
많은 과학자들?아마도 대다수?은 발견의 기쁨을 적어도 목표의 크기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신기한 종족이다. 그들은 타고난 능력을 기꺼이 활용하면서 편안함을 느끼는 협력하는 동물이기도 하며, 뜻밖의 유산처럼 중대한 발견이 예기치 않게 찾아오기도 한다. 과학탐구 활동의 독특한 점은 아주 많은 정규군 보병들이 승리에 기여한다는 점이다. 키츠의 작품들은 살아남고 엉터리 시인들의 헛소리들은 잊혀지는 것과 달리, 과학에서는 미미한 과학자의 활동도 유명한 전쟁에 영구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 이름 없는 일병의 죽음도 헛된 것이 아니다. --- p.39
고생물학은 전적으로 화석 껍데기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껍데기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화석이 되는 것은 거의 언제나 내구성 있는 광물질로 된 단단한 뼈대뿐이기 때문이다. 드물게 예외가 있긴 하지만, 부드러운 해부구조는 거의 남지 않는다. 체조직은 포식자나 분해자의 먹이가 된다. (중략) 화석 껍데기들은 생명의 버려진 잔해, 단단한 파편, 먹을 수 없는 찌꺼기다. 살아 있는 다른 생물들에게 가장 관심 없는 부위가 세월이 흘러 화석으로 변해 여러 학자들과 지질학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니 아주 역설적이다. 삼엽충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들의 껍데기에 관해 알아야 한다.(43~44쪽)
관절다리를 지닌 동물들을 절지동물이라고 하며, 삼엽충이 절지동물의 일종임은 분명하다(다리 화석이 발견되기 오래전부터 이미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이 살아남았다면 전갈, 게, 나비, 딱정벌레, 빈대와 함께 모든 동물의 몸설계들 중에 가장 다양하고 기발한 축에 속하는 종류가 하나 더 늘었을 것이다. 생물 분류의 아버지인 카를 폰 린네(또는 린네우스)는 18세기가 저물기 이전에 이미 삼엽충의 가계도를 그린 바 있다. 그들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해변에서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지 않았을까? “지미야, 제발 삼엽충 다리 좀 잡아 뜯지 마! 불쌍하잖니.” 지미는 다리들이 다른 쪽으로도 구부러질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잡은 동물의 다리를 이리저리 흔들고 싶은 유혹을 떨치지 못할 것이다. 또 그런 것들을 끔찍하게 여기는 마저리 이모를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해 기어 다니는 삼엽충을 잡고 흔들어대기도 할 것이다. --- pp.67~68
다리가 발견될 때까지는 삼엽충을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삼엽충 다리의 실체를 발견할 방법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다리의 껍데기는 오늘날의 새우와 지네의 다리를 덮고 있는 유기중합체인 얇은 키틴과 재질이 같았을 것이 분명했다. 키틴은 광물 껍데기와 달리 화석으로 잘 남지 않는다. 하지만 끈적거리는 아메바만큼 흔적도 없이 사라질 리는 없었다. 부드러운 퇴적물에 이 다리들이 처음에 보존되거나 그 흔적이나 자취라도 보존될 만한 환경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단서들은 있었다. 많은 삼엽충 종들은 공처럼 단단히 몸을 말 수 있었다(별지화보 16). 현생동물들 중에도 수십 종류가 그런 보호방법을 쓰고 있다. 심지어 인간도 몰매를 맞을 때 본능적으로 몸을 만다. --- pp.73~74
고생물학에는 최종진리라는 것이 없다. 언제든 새로운 발견을 내놓는 새로운 관찰자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신기술, 새로운 착상, 심지어 새로운 실수까지도 계속 나타난다. 과거는 변한다. 과거로 향한 끝없는 여행에 나선 과학자는 결코 모든 것을 다 알아낼 수 없으며, 지식탐구에는 끝이란 것이 없다. --- p.86
세계가 눈으로 보도록 만들어져 있다거나 눈이 세계에 볼 것이 아주 많다는 데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물이라는 말에는 굳이 의문을 제기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면 시각의 필연성을 그다지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세계는 그것을 묘사하는 데 쓸 수 있는 다른 신호들로 가득하다. 가령 미묘하고도 어디에나 존재하는 화학신호들인 냄새와 시각만큼 아니 그보다 더 형태를 예민하게 포착하는 촉각이 있다. 촉각은 착시효과를 낳는 그림이나 위장에 현혹되지 않으니까 말이다. (중략)
그래서 나는 빛이 필연적으로 정교한 시각을 낳았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이 행성의 생명이 취한 특정한 경로, 단세포 생물의 단순한 감광성이 정교해지고 개선됨으로 빚어진 결과일 뿐이었다. 삼엽충의 눈은 가능한 대안들 가운데 하나의 특정한 진화가지가 선택되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다. 바로 세계를 볼 수 있도록 한 혁신의 산물이다. 이 문턱은 일단 건너고 나면 결코 잊을 수 없다. 설령 일부 동물들?삼엽충을 포함하여?어둠 속에서 더듬는 쪽을 선호하여 시각을 잃기도 했지만 말이다. --- pp.107~108
눈은 이 고대 명령문 집합의 일부다. 어류나 파리나 인간에게서 눈을 만들도록 하는 자극은 똑같은 것인 듯하다. 배아에서 세포들이 발달할 때, 눈의 분화가 시작되는 시점이 있다. 처음에 일단의 세포 덩어리가 분열을 되풀이하기 시작한다. 최종산물은 전혀 다를 수 있지만?곤충의 눈은 겹눈이고 척추동물의 눈은 수정체를 하나 지닌 눈이다?그 자극, 다시 말해 ‘눈을 만들어라!’라는 명령은 모든 동물에게 공통적인 것일 수 있다. 그 유전자들의 심층언어는 생물들의 바벨탑을 통해 이해될 수 있는 생물설계의 에스페란토어다. 심층에 자리한 그 유전자들은 생물세계를 지금처럼 풍성하게 만든 생명의 놀라운 증식보다 더 앞선 조직 원리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심층구조를 이해하려면 차이점들을 배제시키고 조상의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 눈이 바로 그렇다. --- pp.109~110
삼엽충은 눈 발달의 중간단계가 있었다는 가시적인 증거를 제공한다. 그것은 여전히 모든 배아의 발생에 개입하는 유전자들의 연속성을 증언한다. (중략) 지식의 발전은 우리를 과거와 더 단단히 엮는 구실을 한다. 마치 삼엽충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내 눈을 보라. 당신 자신의 역사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가.”
대다수 삼엽충들에게 눈은 생존의 핵심요소였다(비록 눈먼 삼엽충들도 있었지만). 식물들이 처음으로 육지를 향해 잠시 소풍을 나서기도 전인 1억 5,000만 년 전에 삼엽충이 시각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는 점에 그 누가 감명을 받지 않으랴? --- p.123
이 지질학적 순간에 그토록 많은 화석들이 갑자기 출현한 것을 캄브리아기 진화적 ‘대폭발’이라고 한다. 그렇게 극적인 비유가 쓰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다소 통제에서 벗어난 연쇄반응이라는 개념을 담고 있다. 곧, 진화속도가 엄청나게 증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폭발이 그렇듯이, 그 폭탄은 작지만 그에 걸맞지 않게 폭발력은 엄청나다. 그러나 이것은 파괴적인 폭발이 아니라 창조적인 폭발이다. (중략)
삼엽충은 캄브리아기에 최초의 절지동물들과 함께 출현했기에 그 ‘폭발’의 핵심을 이루었을 것이 분명하다. --- pp.149~151
지질학적 무대에 지나칠 정도로 많은 생물들이 극적으로 출현한 것이 진화사의 진정한 척도로 여겨졌다. 삼엽충은 같은 시기에 분출한 많은 설계안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지만, 거기에 속한다는 것은 분명했으며, 그들은 독특한 결정 눈을 통해 허약하거나 억센 별난 이웃들을 관찰했을 것이다. 캄브리아기 ‘실험’대상들 중에서 그 독특한 광학기술을 터득한 동물은 없었다. --- p.155
나는 종(이 분야의 다소 자화자찬하는 용어를 쓰면, ‘학계에 새로운 종’)의 이름을 붙이는 특권을 받은 극소수의 연구자에 속한다. 이것들이 이를테면 그 뒤의 모든 연구의 원자들이다. 이것은 과학의 매혹적인 끝이 아니다. 과학에서 은하는 노리개며 아원자 입자는 거래대상이다. 이것은 생물학적 작업현장이다. 설명을 해보자.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종이 살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부 동물들, 가령 새들은 크고 눈에 잘 띄기 때문에 이름이 없는 새로운 종을 발견하는 일은 다소 드물다. 하지만 딱정벌레는 나무나 썩은 통나무 밑에서 번성하는 종들 가운데 일부만이 이름이 붙여졌다. 이름 붙이기는 끝이 없는 일이다(아무 딱정벌레 연구자에게 물어보라). --- p.177
예전에는 어류가 실루리아기 말이 되어서야 진화하기 시작했다고 믿었지만, 지금은 새로운 발견들이 이어지면서 어류의 원시적인 친척들이 삼엽충이 살아온 기간 동안 거의 함께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또 그럼으로써 우리는 오르도비스기의 생태를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되었다. 이런 것들이 과거에 대한 인식변화다. 시간의 화살은 앞으로 나아갈지라도, 과거는 회고를 통해 재설계된다. --- p.186
어쨌든 삼엽충은 대다수 해양생물들에 관한 훨씬 더 전형적인 사례를 제공할지 모른다. 직접적인 문제는, 설득력 있는 연구를 하려면 충분히 많은 표본을 채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화석들이 아주 흔하다고 할지라도 오랜 시간을 암석을 깨면서 보내야 한다는 의미다. (중략) 이런 종류의 끈기와 힘과 인내심을 지닌 과학자들이 몇 명 있었다.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그들은 삼엽충이 신종의 기원에 관해 무슨 말을 하는가를 놓고 서로 상반되는 결론들에 도달했다. ‘단속평형설(punctuated equilibrium)’이라는 말은 이제 다소 익숙해져 있다. 나는 최근에 호주의 한 과학철학자가 그것을 ‘펑크 에크punk eck’라고 제멋대로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가설이 전적으로 삼엽충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과학자들조차도 잘 모른다. --- p.193
삶은 멈췄다 출발했다 하면서 진행된다. 종은 다른 종에 대체될 때까지만 존속한다. 그리고 그 대체는 급속히 이루어진다. 종의 지속성과 이소적 종 분화라는 이 두 개념을 통합한 것이 단속평형설의 개념적 토대가 된다. 이 이론이 그 제목을 택한 이유가 이제는 분명해졌을 것이다. 평형은 종의 삶이 지속되는 단계다. 단속은 종이 갑작스럽게 대체되는 시기다. (중략) 그 새 이론은 집단 전체가 조금씩 신종을 향해 움직이는 느리고 다소 연속적인 변화나 변천을 가리키는 ‘점진주의’ 개념에 맞섰다. 점진주의는 1930년대 진화의 ‘현대적 종합’이 이루어진 뒤에 주류 진화모형으로 여겨진 것이었다. 그리고 점진주의가 오랜 기간에 걸쳐 다소 서서히 받아들여졌던지라 ‘단속’ 견해는 출현했을 때 놀라울 정도로 새로운 것인 양 여겨졌다. --- pp.196~197
삼엽충이 드러낸 진화패턴이 단속평형설만은 아니었다. 1970년대 말에 영국의 한 젊은이가 영국과 웨일스의 경계지역인 빌스와 란드린도드웰스라는 오래된 온천마을들 근처에서 삼엽충을 연구하고 있었다. (중략) 피터 셸던은 이 검은 암석들을 채집하면서 여러 해를 보냈다. (중략) 그의 주장은 빌스웰스 주변의 오르도비스기 지층에서 나온 삼엽충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종의 점진주의적 변화를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 pp.203~206
고생물학자의 일은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 분야보다 과학적 상상력을 요구하는 곳은 없을 것이다. 고생물학은 ‘옛 시간의 딸’이다. --- pp.298~299
우리는 결코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됐다, 이제 충분히 알았다. 우리는 공룡 12종을 안다. 13종을 알아야 필요가 있나? 세계에 삼엽충은 이제 충분하지 않나? 거기에 나는 이렇게 답하련다. 탐구에 끝이란 없으며 우리는 다음 절벽 뒤나 다음 셰일 조각 안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고. 내 삼지창 삼엽충은 하나의 꿈, 존재해서는 안 되는 키메라였다. 하지만 그것은 존재했다. 그것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세계는 더 메마른 곳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실제로 존재하는 전율을 불러일으킬 것들이 더 많이 발견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 p.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