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아름답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난 일은 모두 좋은 것 같습니다. 현실이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옛날이 그립고, 현실이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옛일이 그립습니다. 현재가 괴로우면 과거의 그 달콤함을 유지하지 못했음이, 지키지 못했음이 아쉽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저렇게 복계를 한들 마음뿐이지 이미 ‘과거는 흘러갔다’입니다. 그렇다고 그 과거가 반드시 지금보다 좋았다고 볼 수도 없지만, 세월이란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때문에 아렸던 기억들은 사라지고 좋은 기억만 남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과거를 재생한다면, 그래서 그 과거가 현재로 돌아온다고 해도 지금 누리는 현재처럼 불만이기는 마찬가지일 겁니다.
지금 좋은 사람들, 소위 남 보기에 행복한 사람들, 그들도 과거를 그리워합니다. 그들의 삶은 겉과 속이 달라서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즐겁지만, 남들이 보기에 잘 나가지만, 남들이 보기에 화려하고 행복하지만, 실제의 자신은 그렇지 못한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의미를 먹고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남들 보기에 화려한 삶은 남들의 기준에 맞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기준에 맞춘 행복, 달리 말하면 사회의 기준에 맞춘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 성공으로 바쁘니까, 그 상황이 계속 이어지니까 그게 행복이려니, 진정한 성공이려니 잊고 삽니다. 그러다 그 맥이 끊기고 자신을, 진정한 자신을 찬찬히 돌아보는 시간이 옵니다. 그때 느끼는 허망함, 그제야 진정한 자신의 상황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마치 시시포스가 신들의 벌을 받아 끝없이 돌을 언덕으로 굴러 올리다가 언덕에 이르러 짐을 내려놓고 고뇌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때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은 두려움의 시간, 괴로움의 시간입니다. 제 삶을 살지 못하고 남의 삶, 남들의 맞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순리를 멈추려 해도, 시간의 흐름을 멈추게 하려고 해도, 시간은 여지없이 흐르고 또 흐릅니다. 골방에 소년을 가두어도, 소년은 청춘으로 흐르고, 청춘을 유지하고 싶어 아무리 기를 쓰고 폐쇄적으로 살아도 이내 청춘은 노년을 부릅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하니 모든 게 얽히고 자꾸 괴롭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알고 그 흐름을 인정하며, 자신의 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은 얼어 얼음으로 있어도 늘 얼음일 수 없습니다. 날씨가 풀려 봄이 오면 아무리 두꺼운 얼음도 쉽게 본질인 물로 돌아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년은 청년으로, 청년은 장년으로, 장년은 노년으로 어김없이 변합니다. 시간은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습니다.
기계적인 시간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계기적으로 흘러갑니다. 그 시간의 흐름만큼 우리 또한 여지없이 신체의 변화를 맞이합니다. 그 흐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나이 들고, 자라고, 늙어갑니다.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그런 시간 속에서 어떤 이는 행복하게 살고, 어떤 이는 불행하게 삽니다. 이렇게 차별이 생기는 이유는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 탓이 아닙니다. 그 시간을 다르게 느끼는 심리적인 시간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기계적인 시간보다는 각자 다르게 쓸 수 있는 심리적 시간이 더 중요합니다.
또한 시간은 아주 정확하게 흐른다 한들, 주어지는 속도는 같다는 한들, 주어지는 시간의 양은 모두 다릅니다. 시간의 흐름은 공평할지라도, 주어지는 시간의 양은 결국 공평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많이 받은 사람이 행복한 건 아닙니다. 시간을 조금 받은 사람이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받은 시간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주어진 시간 속에 무엇엔가 집중할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요. 행복하게 살려면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않는, 무엇엔가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무엇을, 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거기에 집중할 수 있고, 집중할 수 있으면 시간의 흐름이 허무하지 않고, 늘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자고요. 사랑하는 시간, 그것은 천 년을 하루처럼 사는 즐겁고 유쾌한 일이니까요. 오늘은 일을, 사람을, 놀이를 사랑할 시간입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