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이런 매혹 옆에는 불만을 품은 젊은이들을 향한 관음증적 시선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60년대에는 눈부시게 타오르며 굵고 짧은 삶을 살다 간 로큰롤 스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상업 예술계는 대중들의 관심을 끌고 예술적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예술가들 주변에 이와 비슷한 신화들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 예술가들의 때 이른 죽음 이후 그들의 명성을 지탱해 준 신화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들이 우리의 집단적 상상력 속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차지할 수 있었을지 고려해 보는 것이 매우 흥미로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충격적으로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나 빈센트 반 고흐 같은 화가들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을까? 나는 여기 소개된 많은 예술가들을 에워싼 채 그들의 작품에 관한 중요한 진실을 은폐하기도 하는 이런 신화들을 해독하기 위해 노력했다.
---「서문」중에서
이 책에 소개된 모든 예술가들 가운데 위험한 신화화로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사람은 바로 장미셸 바스키아였는데, 그에 대한 신화화는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바스키아의 인생사가 그의 예술에 내재된 힘을 압도할 정도였다. 바스키아 신화가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가차 없고 우울할 정도로 백인 중심적인 예술계의 증후를 보이기 때문이다. 폭발적이고 전례 없으며 극적이고 끔찍할 정도로 불운했던 바스키아의 이력은 1980년대 뉴욕의 인종, 정치, 돈, 권력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1980년대는 탐욕과 속도의 시대였고, 바스키아의 급격한 성공은 예술과 문화의 이 우려할 만한 상품화를 대표한다.
---「장미셸 바스키아: 바스키아는 왜 비싼가?」중에서
수십 년간 연극과 영상 매체에 영향력을 행사해 온 이런 식의 사건 묘사가 고흐의 성취와 지성을 제대로 드러내 주지 못하는 환원주의적 해석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비록 심각한 정신 질환으로 고생했지만 반 고흐는 아웃사이더 예술가가 아니었다. 그는 예술사에 조예가 깊었고, 청소년 시절에는 7년 넘게 헤이그와 런던에 있는 삼촌의 미술품 판매점에서 일하기도 했다. 1853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고흐는 언어에도 능통했다. 그는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영어로 말하고 쓰고 읽는 데 능숙했으며, 독일어 문장을 읽을 수도 있었다. 또한 독서량도 엄청났다. 고흐의 편지에는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800여 명의 작가들이 인용되어 있는데, 그는 다른 어떤 작가들보다도 디킨스를 자주 언급했다. 반 고흐는 그 자신이 열렬한 인도주의자였던 만큼 빅토리아 시대의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디킨스의 공감 어린 태도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빈센트 반 고흐: 오해도 사랑도 가장 많이 받는 거장」중에서
실레의 작업에는 고양된 감정이 담겨 있고, 그의 작품은 눈에 띌 정도로 ‘실제 세계’와 동떨어져 있다. 그의 예술은 빈의 정신과 의사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이룩한, 자아와 성에 관한 인식의 놀라운 변화와 연관 지을 수 있다. 프로이트 이전까지는 자기 성찰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이 익숙한 생각을 무너뜨리고, 그 대신 우리에게 자신도 모르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아마도 실레가 자신의 얼굴에 엄청난 관심을 보인 건 이 가설 때문일 것이다. 렘브란트, 알브레히트 뒤러와 더불어 실레는 자화상 분야의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데, 그는 자신의 모습을 100여 점이 넘는 작품들을 통해 묘사했다. 1910년 작인 〈앉아 있는 남성 누드(Seated Male Nude)〉(때때로 ‘노란 누드(TheYellow Nude)’라 불리기도 함)는 자화상의 역사로부터 극적인 일탈을 보여준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실레는 그 자신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해부하다시피 한다. 성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들쭉날쭉하게 묘사된 그의 알몸은 하얀 캔버스 위를 떠다닌다. 진한 노란빛의 피부와 붉은 젖꼭지, 눈, 성기를 물들인 구아슈 물감은 강렬한 선에 비하면 부차적일 뿐이다. 그의 발과 손은 제거되었고 얼굴은 모호하다.
---「에곤 실레:내면의 고통을 그려 낸 초상화의 거장」중에서
혼자 힘으로 새로운 삶을 구축해 가는 동안, 그녀는 헝가리계 유대인 사진가였던 엔드레 프리드만을 만났다. 타로는 그가 ‘불한당이자 바람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훗날 그녀의 멘토가 될 이 동료 진보주의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두 아웃사이더는 상황이 유대인 이민자에게 점점 더 적대적으로 변하자 큰 어려움을 겪었다. 프리드만은 종종 자신의 카메라를 저당 잡혔지만 타로에게 기본적인 사진 기술을 가르쳐 주었고, 타로는 얼라이언스 사진 에이전시에서 근무하면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열정적으로 섭렵해 나갔다. 파리에서 외국인을 향한 반감이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 이들은 함께 미국인 보도 사진가의 신분을 지닌 로버트 카파라는 가상의 인물을 창조했다. 프리드만의 작품은 그럴듯한 이름을 지닌 이 가상의 사진가가 창작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는 본명을 사용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을 받고 자신의 사진들을 신문사에 판매했다.
---「게르다 타로: 전쟁의 비인간성을 고발한 사진작가」중에서
배타적인 것으로 악명 높은 예술계의 심장부로 단번에 진입해 들어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예술가들이 활동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오직 진정으로 독창적이고 확신에 찬 목소리만이 평론가들의 귀에 들어갈 수 있다. 카디자 사예는 눈에 보이지는 않는 그 단단한 장벽들을 뚫고 24세의 나이에 주목해야 할 신인으로 평가받았다. 그녀가 임대 아파트에서 매우 적은 수입으로 생활하고 사회적 특권이 없는 흑인 여성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녀는 이 책에 실린 예술가들 가운데 활동 기간이 가장 짧지만, 오늘날의 사회적 쟁점을 개인적이면서도 역사적인 방식으로 아름답게 탐색한 예술가로 기억될 것이다.
---「카디자 사예: 배타적인 예술계를 단숨에 사로잡은 아웃사이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