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이번에도 퇴원하실 테니까.’
늘 그랬다. 의사가 엄숙한 얼굴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통보해도, 아빠는 그때마다 한 고비 한 고비 넘기셨다. 심지어 심장이 멈췄어도, 드라마에서나 보던 자동 심장충격기까지 동원하며 다시 살아나셨다. 람보처럼 강한 전사의 모습으로 전장을 헤치고 나온 것이 아니라, 모두 슬퍼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홀연 생명력을 보였다. 아스팔트 틈새로 비어져 나온 잡초처럼 삶을 또 꼼지락꼼지락 피워냈다. 그래서 이번에도 우리 가족은 ‘마음의 준비’ 대신 퇴원 후의 삶을 대비하고 있었다. ‘이번엔 입원이 좀 길어지네’ 하면서.
--- p.7
‘언제부터 그렇게 아빠 생각을 했다고?’
아빠가 좋아하시던 얼갈이배추 무침이 밥상에 올라왔다. 반색하는 아빠의 얼굴이 머릿속에 겹치려는 찰나, 마음속의 또 다른 내가 따지고 든다. 나는 슬퍼할 자격이 없다. 나를 속속들이 아는 건 나니까 단죄 역시 내 몫이다. 미워한 만큼 빚지는 법이라고. 의식은 감정을 왜곡시킨다. 슬픔을 저만치 어딘가에 가두려 한다. 하지만 그런 시도가 언제나 유효하지는 않다. 누군가에게 아빠 이야기를 꺼내놓기 전에 가만히 심호흡부터 하는 나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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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간간히 뭐라 뭐라 말씀하신다. 미간에 힘을 팍 주고 집중해도 나는 도통 해석이 안 되는데, 용케도 엄마는 다 알아듣고 대꾸를 하신다.
“알았어, 알았어. 누룽지 끓여줄게.”
허망하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순간일 수도 있는데 겨우 누룽지 타령이라니. 이 세상에 남을 가족에게 소회든 사과든 부탁이든 뭐든 인생을 가로지르는 말 한마디쯤은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다들 절절하게 유언을 남기던데 이게 뭐람. 역시 아빠답다. 이 와중에도 당신 드시고 싶은 것만 말씀하시는구나.
--- p.18
“아이고 상주니임,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아. 제가 사흘간 물심양면으로 도와드릴 테니 아아무 걱정 마십시오오.”
새로운 고객을 맞으려 청소 중인 빈소 앞에서 처음으로 담당 장례 지도사의 얼굴, 아니 ‘면상’을 보았다.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땅딸막한 남자는 걸걸한 목소리로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위로에서 영혼이라고는 소면 한 가닥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신이 간밤의 그 문제적 인사구먼? 눈 뜨고 코 베어 갈 인간.’
물건 값 흥정하는 것도 아니고, 아빠 장례를 이틀로 후려치려다가 고모부의 몇 마디에 꼬리 내린 장례 지도사. 신뢰는 이미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달리 도리가 없다. 이 사람이 우리를 도와줄 담당자라 하니 적당히 친절하자. 대신, 선수 치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빈틈은 보이지 말아야지. 여보세요, 우리 그렇게 만만한 사람들 아닙니다. 입은 웃으면서도 눈으로는 레이저를 쏘았다.
--- p.39
분향실에서 조문객을 맞을 때는 완장 찬 이를 기준으로 줄을 선다. 향냄새 진동하는 작은 빈소에서도 권위의 허울은 막강하다. 제단과 가까운 윗자리부터 동생-올케-나 순서로 도열한다. 내가 동생보다 손위지만 이곳에서는 동생보다, 심지어 그 배우자보다도 서열이 낮다. 올케는 오 씨가 아닌 데다 아빠와 맺고 지낸 인연도 가장 짧다. 나이도 핏줄도 완장일 수 있지만, 남성이라는 성별은 모든 것을 이기는 무적 카드다. 엄마께 무심히 상주의 위계와 불만을 이야기했다. 사실 이제 그런 정도로는 화도 나지 않았다. 그랬는데 엄마는 엄마대로 당신의 불편한 입장을 토로하신다.
“나는 그나마 설 자리도 없어.”
엄마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뜬 순간 ‘미망인’, ‘아직 고인을 따라 죽지 않은 이’라는 섬뜩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죽어야 마땅한 자’는 애도의 장에 정식으로 참여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엄마는 장례 기간 내내 분향실에서 우리들이 만든 줄 끄트머리에 어정쩡하게 서서 조문객을 맞으셨다.
--- p.66
“네가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엄마 잘 모셔야 한다.”
장례식장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엄마 앞에서는 눈물마저 참고 있는데, 다들 나만 채찍질한다. 대학 입시를 앞둔 고3 수험생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딴에는 관심이었을 것이다. 그들 나름으로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나와 교분이 깊은 이들이 아니다. 내 사정이나 성격 같은 건 알지도 못하고 조금 안다 해도 그리 대단치 않다. 먼저 내 심경을 물은 적도 없다. 자기들이 느낀 인상대로 판단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즉각 숙제를 던지는 것이다. 무신경한 충고는 듣는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아니 상처를 주는 훈수일 수 있다. 그들에 의하면 나보다 엄마가 더 슬프다. 감정을, 슬픔을 비교한다. 슬픔이라는 것에 절댓값을 매길 수 있을까? 가족을 잃은 것은 다 같은데 누구는 10만큼 슬프고 또 누구는 3만큼 슬플까? 슬픔의 종류나 내용은 다를 수 있되, 정도를 계측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 p.142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을 땐, 어휴, 말도 마.”
“나도 겪어봐서 아는데 말이야….”
다들 내 마음을 참 잘도 안다. 알고도 남아 넘칠 지경이다. 그래서 내 말을 듣기보다 자기네 경험담을 꺼내놓기 바쁘다. ‘네가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훨씬 더 힘들었어.’ 듣다 보면 그들은 형용 못 할 고통을 겪었는데 나는 별것도 아닌 일로 징징거리는 사람 같다. 힘든 경험도 경쟁을 한다.
--- p.146
우리 아빠는 리어왕만큼 재산이 많지 않아서였는지, 가족의 우애를 믿으신 건지, 유산에 대해서는 남긴 말이 없었다. 살고 있는 집에 대해서도 아무 언질이 없어서 이미 말한 것처럼 나는 상복을 반납하자마자 집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우리는 그나마 행복한 편이다. 만일 아빠가 빚을 졌는데 우리가 모르고 상속을 받았다면 암울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미 떠난 아빠의 뒤꼭지가 더 밉상이었을 수도 있다.
굳은 뜻을 갖고 적극적으로 삶을 정리하고 자진해서 죽음에 임하는 사람들도 있다. 2018년 104세였던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은 고령으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고 삶의 질이 급격하게 떨어지자, 스위스까지 날아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어떤 이는 이를 자살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존엄사라 한다.
아빠가 판단력마저 잃었을 때, 우리 가족은 아빠의 심장 이식 수술 여부를 고민하느라 영혼까지 시렸다. 사전에 당사자가 연명 치료 의사를 결정하고 가족과 공유했다면, 우리도 분노와 죄책감 따위로 괴롭지 않았을 것이다.
--- p.224
돈·가족·명예 등에 대한 집착같이 내 삶을 제약하는 욕망이 무엇인지, 어떤 얼굴로 세상을 마감하고 싶은지 등을 차분하게 생각한 뒤 영정 사진을 찍음으로써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한다. 그 사진을 내가 진짜 영정으로 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프로젝트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나의 마지막 얼굴, 곧 현재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는 영정 사진은 내가 보기에 ‘죽음 사진’이 아니라 ‘인생 사진’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차경과 처음으로 영정 사진을 찍고서야 나는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영정 사진을 찍었다고 하자 사람들은 무슨 일 있느냐며 걱정하거나 괴이하게 여겼다. 엄마는 “늙은 에미 앞에 서 못 하는 소리가 없다”고도 하셨다. ‘영정’은 곧 ‘죽음’이라는 공식으로 금기시된다는 걸 그렇게 확인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고운 모습을 남겨야지”라고 해주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찍은 영정 사진 후보들을 나는 사무실 창가에 늘어놓았다. 하루에 몇 번쯤 그 사진들을 볼까? 일이든 마음이든 안 풀릴 때는 일부러 들여다보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얼른 거울을 꺼내 당장의 내 얼굴을 살핀다.
…이제는 해마다 연말이면 나의 1년이 고스란히 담긴 얼굴을 포착하기 위해, 그러니까 한 해를 돌아보기 위해 영정 사진을 찍는다. 나만의 해넘이이자 해맞이 의식인 셈이다.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느낌이 사진에 묻어나면 좋겠다. 그러려면 자유롭고 유연하게 살아야 할 텐데, 오늘 나는 과연 그렇게 살고 있을까?
--- p.170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해. 전에는 집에서도 아빠 계신 병원이 보여서 안심이 되더니만, 이제는 병원이 보이니 너무 고통스럽네.”
아빠가 돌아가시자마자 엄마는 이사 얘기를 꺼내셨다. 우리 집 마루에서는 보려 하지 않아도 병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우리가 그 집으로 이사를 간 이유였다. 그러나 그 목적을 잃은 이제는 다른 곳으로 가자 하신다. 4년이 흘러 이제야 동네가 익숙해질 만하니, 아니 불편함도 참고 지낼 만해지니 또 가자 하신다.
가족의 죽음이 준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는 물건을 버리거나 집을 파는 것처럼 생활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한다.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가장 극한의 재난 상황’에 처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탈진되어 스스로를 잘 다룰 수 없는 때이므로 나중에 후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변화보다 자신과 가족에게 집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충고다. 그러나 엄마가 집 때문에 고통스러우시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엄마한테 이사는 시간문제일 뿐 기정사실이었다. 삼우제를 지내고 나흘 뒤, 우리는 조문 답례 인사와 동시에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 p.178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아본 아빠의 편지. 평생 다정한 말 한 번 해본 적 없는 분답게 편지는 간결했다. 고3 시기를 이런저런 병치레로 보냈는데도 무사히 대학에 합격해줘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는 곧 놀고먹는 대학생으로 전락할까 노심초사하는 염려로 이어졌다.
‘아휴, 잔소리. 엄마는 아빠 연애편지에 넘어가 결혼하셨다더니.’
대체 아빠 편지의 어느 부분에 엄마가 반했다는 것인지 당최 모르겠다.
…이삿짐을 정리하다 그때 그 편지를 발견했다. 봉투를 보자마자 눈물이 솟구쳤다. 잔소리 편지를 받은 그날보다 더 많이 울었다. 아빠는 뭘 쓰든 먼저 연습을 하시곤 했다. 우리 집 명필답게 글씨도 반듯반듯 잘 쓰시는 분이 왜 연습을 하실까? 아마 그 편지도 그랬을 것이다. 몇 번이나 연습을 하셨을테지? 종이를 몇 장이고 구겨 버리셨겠지? 쑥스러운 걸 이길 만큼 나의 회복과 합격이 기쁘셨겠지? 몰래 편지를 줄 생각에 혼자 빙그레 웃으셨겠지? 그때는 보이지 않던 행간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20년도 더 지나 눈앞에 나타난 편지, 아빠는 이 편지로 내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셨을까? 편지의 제목 ‘졸업을 축하하며’. 아빠는 내가 갈피를 잃은 애도에서 졸업하기를 바라시는 걸까? 졸업을 해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법이니.
--- p.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