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전 p. 124~126
“어떻든지 우리는 그저 내지인과 동등한 대우만 해주면 나중엔 어찌 되든지 살아갈 테에요.”
하며 궐자는 또 한 번 사방을 휙 돌려다 보고 나서 목소리를 한층 낮추어 계속한다.
“가령 공동묘지만 하더라도 내지에도 그런 법률이 있다 하면 싫든 좋든 우리도 따라갈 테에요. 하지만 노형은 자세히 아시겠지만 내지에도 그런 법이 있나요?”
의외에 궐자는 공동묘지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아까 형님한테 한참 설법을 듣고 오는 길에 또 이러한 질문을 받는 것이 괴상하다고 생각했다. 언제 규정이 된 것인지, 어떻게 시행하라는 것인지는 나로서는 알 바도 아니요, 그까짓 것은 아무렇거나 상관이 없는 것이지만, 아마 요사이 경향에서 모여 앉으면 꽤들 문젯거리로 삼는 모양이다. 나는 한번 껄껄 웃어주고 싶었으나 그리할 수는 없었다.
“일본에도 공동묘지야 있지요.”
나 역시 누가 듣지나 않는가 하고, 아까부터 수상쩍게 보이던 저편 뒤로 컴컴한 구석에 금테를 한 동 두른 모자를 쓴 채 외투를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 일본 사람과, 김천서 나하고 같이 오른 양복쟁이 편을 돌려다 보았다. 나의 말이 조금이라도 총독 정치를 비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중에서 무슨 오해가 생길지 그것이 나에게는 염려되는 것이었다.
“정말 내지에도 공동묘지가 있에요? 하지만 행세하는 사람이야 좀 다르겠죠?”
“그야 좀 다르겠지요만, 어떻든지 일본에서는 화장을 흔히 지내기 때문에 타고 남은 뼉다귀만…… 아마 목구멍뼈라든가를 갖다가 묻고 목패든지 비석을 세우지요. 그러지 않아도 살아 있는 사람도 터전이 좁아서 땅 조각이 금 조각 같은데, 죽는 사람마다 넓은 터전을 차지하다가는 이 세상에는 무덤만 남고 말 게요. 허허허.”
나는 이러한 소리를 하면서 묘지를 간략하게 하여 지면을 축소하고 남는 땅은 누구의 손으로 들어가고 마누 하는 생각을 하여보았다.
“그리구서니 자기의 부모나 처자를 죽었다구 금세루 살라야 버릴 수가 있습니까? 더구나 대대로 내려오는 자기 집 산소까지를…….”
궐자는 나의 말이 옳다는 모양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도 그래도 반대를 한다.
“화장을 지낸다기루 상관이 뭐겠소. 예전에 애급이라는 나라에서는 왕후장상의 시체는 방부제를 쓰고 나무 관에 넣은 시체를, 다시 석관까지에 튼튼히 넣어서 피라미드라는 큰 굴 속에 묻어두었지만, 지금 와서는 미라밖에는 되지 않고 만 것을 보면 죽은 송장에게 능라주의를 입히고, 백 평, 천 평 되는 땅에다가 아무리 굳게 파묻기로 그것이 무엇이란 말이오. 동상을 세우면 무얼 하고 송덕비를 세우면 무엇에 쓴다는 말이오.”
양과자갑 p. 396~398
보배는 그러면 그렇지 그 훌륭한 양가구를 돈으로야 샀으랴 하는 생각을 하며 번역을 하여 들려준다.
“사랑하는 미쓰 리…….”
보배는 ‘사랑하는’이란 말이 선뜻 입에서 아니 나와서 그만두어 버릴까 하다가, 그거야 서양 사람의 편지투에 보통 쓰는 말이니 계관할 것이 무어 있으랴 하는 생각으로 학교에서 독본 번역하듯이 기계적으로 읽으면서도 귀밑이 뜨뜻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앞에 섰는 미인의 얼굴도 살짝 발개졌으나 그것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도리어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섰는 이 여자의 얼굴에는 반기는 듯하고 흡족해하는 화려한 웃음까지 떠올라 왔다.
다 읽고 나니까 이 미인은 편지를 받으며 그래도 좀 열적은 듯이 웃으며
“고맙습니다. 이 ‘리처드슨’은 바깥양반 친구인데 어제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방에 아무 치장도 없는 것을 보고 접수해 둔 양가구가 있으니 갖다가 쓸 테거든 쓰라구 보내준 거예요.”
하며 변명 삼아 양가구의 내력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헤에, 그거 좋군요.”
모친은 얼마나 좋은 것인지 보지도 못하고 허청대고 대꾸를 하여준다.
이 부인도 딸의 입에서‘사랑하는’어쩌고 하는 소리가 흘러나올 제 에구 망측스러워라 하고 주름살 진 얼굴이 붉어졌던 것이다. 도대체 그러한 편지를 딸에게 번역을 시키게 한 것이 잘못이라고 하였으나 이것도 집 없는 탓이니 어쩌는 수 없다고 속으로 혀를 차는 것이다.
“어머니, 그 색시 남편이 있나요?”
안집 색시가 들어간 뒤에 보배는 모친을 따라 방으로 올라오며 이런 소리를 한다.
“아, 그럼 남편 있지. 왜 편지에 무어라구 했던?”
“글쎄 말예요. 편지에 ‘미쓰’라고 한 것은 처녀에게 쓰는 말인데요, 지금 또 색시 말을 들으면, 바깥양반 친구니 어쩌니 하니 말이죠…….”
보배는 그 색시가 서양 사람에게는 처녀 행세를 하는 것인지, 리처드슨이 ‘미세스’라고 쓸 것을 잘못 쓴 것인지 어정쩡해하는 것이다.
“누가 아니. 처녀거나 갈보거나 아랑곳할 것두 없지만, 아마 첩인가 보더라.”
이 말은 전부터 들은 말이다.
“옷 입은 맵시가 딴은 그래요. 하지만 기생인지도 모르죠.”
“그두 모르겠지만 그 어머니란 이가 얌전한 여염집 아낙네인 걸 보면 기생퇴물 같진 않구…….”
모친은 딸에게 그 꼴을 보이기도 싫고 이러니저러니 입초에 올리기도 싫으나, 대체 본탈이 무엇인구 하는 호기심은 모녀가 똑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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