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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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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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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6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400쪽 | 581g | 153*225*20mm
ISBN13 9788968172373
ISBN10 8968172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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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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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소개
김길훈 : 프랑스 엑스마르세유대학교 DEA/전북대학교 불문학 박사이다. 현재 전북대학교 프랑스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주요 역서로 『현대영화이론』 외 다수가 있다.

김건 : 파리 1대학교 영화학 박사이다. 현재 전북대학교 기록관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주요 역서로 『장-뤽 고다르』 외 다수가 있다.

진영민 : 파리 1대학교 DEA이다. 현재 프리랜서 통번역사로 활동 중이다. 주요 역서로 『오늘날의 프랑스 영화』등이 있다.

이상훈 : 파리 ESEC 영화학교를 졸업(연출 전공)했다. 현재 부산국제단편영화제 프로그래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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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영화는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알랭 바디우와의 인터뷰(질문자: 앙투안 드 베크)


영화에 대해 기고한 당신의 글들을 모으면서, 내가 첫 번째로 받은 인상은 마치 영화가 당신의 지적인 삶 전체에 동행했던 것처럼 오랜 기간에 걸쳐서 글들이 폭넓게 펼쳐져 있다는 점이다. 당신이 20살 때인 1957년에 ≪새로운 포도주≫라는 잡지에 발표한 [영화 문화]와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에 대한 2010년의 마지막 글까지, 영화는 당신에게 대단히 중요한 예술로 보인다.
영화는 삶과 사상을 구축하는 나의 배움과 존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록 20살 때가 돼서야 나의 첫 번째 글이 나왔지만, 그전에도 당시에 매우 높은 수준의 영화 동호인 단체였던 학교의 시네클럽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모임의 사회도 보면서, 나는 영화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영화가 중요하다는 점을 명확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과 2학년 때는 영화를 소개하고 설명하는 역할을 여러 차례 했다. 오래전부터 영화는 내 삶에 자리 잡고 있었고, 영화가 오락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이전부터 했다. 고등사범학교 준비반이었던 18살 때 툴루즈(Toulouse)에서, 나는 영화와 다른 예술들 간의 관계와 연관된 오손 웰즈(Orson Welles)의 [오델로](Othello, 1952)에 대해 강연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웰즈의 영화가 셰익스피어의 수준에 도달했음을 단호하게 주장했다. 나는 웰즈의 목소리에 매혹되었고, 그의 목소리 자체가 영화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갔을 때, 시네마테크 프랑세즈(Cinematheque francaise)가 학교에서 몇십 미터 근처의 울름가(街)에(rue d'Ulm) 있어서, 나는 거의 매일 밤 그곳에 갔다. 나는 예술들 중에서 영화가 동시대에 참여하도록 인도하는 예술이고, 결국 현실참여에 다소 늦게 뛰어든 나에게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앙리 랑글루와(Henri Langlois)가 헌신적으로 상영한 스트로하임(Eric Von Stroheim), 그리피스(D. W. Griffith), 채플린(Chalie Chaplin) 영화들을 보는 방법을 배웠다. 한편으로 박물관, 콘서트, 오페라를 드나들면서도 이런 영화들을 계속해서 보았다. 이런 예술 입문의 경험들은 결코 동일하지 않았다. 영화들 심지어 고전 무성영화조차 틴토레트(Tintoret)의 그림이나 베토벤의 4중주가 제공할 수 없는 언제나 동시대적인 어떤 사상을 제시했다. 나는 여전히 이런 차이를 느끼고 있다. 즉 영화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어떤 것은 독특한 방식으로 가르치고 일깨운다. 오늘날에도 나는 오로지 영화를 통해 미지의 나라들에 대한 지리적 정보와 내가 모르는 언어 그리고 완전히 고유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보편적인 여러 사회적 상황을 배운다. 영화는 이 모든 것을 포착한다. 영화의 유일한 경쟁자는 소설일 수 있지만, 영화는 유연성, 유동성, 훨씬 생생하게 포착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발간된 다음 해에 번역된 카자흐스탄 소설 한 권을 찾기는 어렵지만, 매해 여러 번에 걸쳐 카자흐스탄, 아르메니아, 쿠르드, 시리아, 세네갈,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영화를 파리의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 결과 영화가 절충적이지만 깊이 있는 예술이기에, 우리는 카자흐스탄이나 방글라데시의 사람들과 동시대인이라는 것을 빠르고 깊이 있게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은 르포르타주의 기능이 아니다. 반대로 이런 영화는 일반적으로 아주 복잡한 허구이고, 본질적으로 우리와 거리가 멀지만, 가장 창조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결국 시네필이었다는 말인가?
1950~60년대에는 열렬한 시네필이었지만, 당시에 다른 많은 사람과 비슷한 정도이지 특별한 시네필까지는 아니었다.

사실상 지식인 세대가 시네필 집단에서 형성되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자크 랑시에르, 질 들뢰즈, 제라르 주네트 등은 이런 관점에 빚을 지고 있다고 언급한다. 이와 연관된 지점에서 자크 리베트(Jacques Rivette), 프랑소와 트뤼포(Francois Truffaut), 장 뤽 고다르, 장 두셰(Jean Douchet)와 같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ema)의 첫 번째 세대들을 찾아볼 수 있다. 시네필 집단과 교류가 있었나?
영화에 대해 알아가던 시기에, 나는 조직화된 시네필에 속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당파에도, 어떤 시네필 조직에도 속하지 않는 고립된 시네필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완전히 다른 관점인 정치를 통해 시네필 집단에 동화되었다. 당시에도 이미 어느 정도 영화를 접했지만 나는 파리에서, 시네마테크에서, 라틴구(quartier latin) 거리의 영화관에서, 그 자체로 풍성한 수많은 영화를 다소 투박한 시선으로 감탄하였다. 당시에, 동시대의 입장처럼 표명되는 극단적으로 자유롭고 열정적인 영화의 역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러 사람이 본 영화에 대해 술집에서 토론했지만, 결국은 홀로 고독하게 교양을 채워가는 일이었다. 영화는 언제나 일상적인 토론의 대상이었고, 바로 이것이 친밀하고 오래전부터 이어져 오는 교양 쌓기의 역할을 강화시켰다. 이런 점은 어쨌건 중요하다. 어떤 의미로 영화는 아주 광범위한 유형의 교육이며, 적어도 과거에는 그랬다. 많은 사람이 영화를 보고 토론을 했다. 그래서 대중 교육의 하나로서의 영화를 이야기하였다. 영화는 공유 예술이다. 우리는 어떤 영화를 볼 때 수많은 사람이 그 영화를 본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렇지만 이 사실은 긍정적이든지 부정적이든 영화가 가치가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을 위한 일종의 학교라는 점을 지칭한다. 19세기에 소설, 나아가 시(詩)가 맡았던 문화 대중화의 역할을 20세기에 영화가 수행한다. 나는 영화에 대해 경탄을 보냈지만, 조직화된 시네필 활동을 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툴루즈에서, 그 이후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을 때 어떤 특정한 영화들이 다른 영화들보다 더 특별한 역할, 즉 의식화의 매체로서의 역할을 했는가?
우선, 문화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행위와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는 행위와는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예를 들어 위대한 무성영화를 통해 영화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을 발견하는 것이고, 후자는 주변의 영화관들에서 상영된 당시 최신 영화들을 보는 것이다. 나는 아주 열성을 다해 수많은 무성영화를 관람했다. 물론 채플린 영화를 많이 봤지만, 특히 에이젠슈타인(Sergei M. Eisenstein), 무르나우, 스토로하임의 영화들에서 가장 확실하게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감독들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힘의 명백함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런 경험은 아주 흔한 일이지만 감독들에게 강한 인상을 받는 체험은 아주 소중했다. 내게 충격을 준 것은 예술적 힘의 다양성이었다. 좀 더 현대적인 영화에 관련해서, 나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전통적인 시네필과는 반대로 미국 영화를 자주 보러 가지 않았다. 따라서 ≪카이에 뒤 시네마≫의 시네필에 의해 ‘프랑스의 품질영화(qualite francaise)’라고 낙인이 찍힌 프랑스 영화들이 아니라, 누벨바그의 전위대였던 타티, 브레송, 프랑주(Georges Franju)와 같이 아주 독특한 영화 작가들의 영화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영화들은 기발한 것들의 묶음이었다.

당시 프랑소와 트뤼포는[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Une certaine tendance du cinema francais, 1954)이라는 글에서 ‘프랑스의 품질영화’에 반대하며 맹렬히 비난했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당신이 언급한 감독들에다 장 르누와르 (Jean Renoir)와 자크 베케르(Jacques Becker)를 추가하며 그들을 작가(auteur)라고 명명했다.
당시에 트뤼포가 쓴 글을 읽지 않은 상태였지만, 나는 아주 무의식적으로 그가 반대하는 것에 공감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트뤼포와 같은 의견이다. 나는 [사형수 탈출하다](Un condamne a mort s’est echape, 1956], [소매치기](Pickpocket, 1959), [당나귀 발타자르](Au hasard Balthazar, 1966) 등과 같은 미학적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영화들을 통해 브레송 영화의 아름다움을 아주 강렬하게 느꼈다. 또한, 나는 언제나 타티의 열렬한 찬미자였다. 익살극의 전문가일 뿐만 아니라 탐구자로서의 모습을 보였던 그는 특히 [플레이타임](Playtime, 1969)에서 공간과 소리에 대한 단호한 명제들로 나를 열광시켰다. 나의 첫 번째 영화적 취향은 바로 이런 영화들이며, 이 영화들은 다양한 무성 영화들과 개성이 넘치는 소수의 프랑스 영화들이었다.

영화에 대한 사랑이 타 예술 분야와 다른 점을 발견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는가?
개인적인 경험상, 나는 무성 영화의 발견과 그리스 비극의 강독이 동시에 이뤄졌다고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오히려 나는 역설적으로 영화와 다른 예술들이 뒤섞여있다는 주장하고 싶다. 그 이유는 아이스킬로스(Aeschylos)의 비극과 무르나우의 영화,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 (Intolerance: Loves’s Struggle Throughout The Ages, 1916) 또는 멜리에스(Georges Melies)의 몇몇 영화는 결과적으로 나에게 동일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비극 작품이든 영화 작품이든 간에, 새로운 예술에는 매우 높은 수준의 상태로 위치시키는 특별한 감정이 존재한다. 오래되어서 좋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대단하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그리스 비극의 합창단, 가면, 미장센 그리고 무성 영화의 촬영, 단역, 무대와 같은 복잡한 요소들을 한데 묶어 작업하던 예술가들의 과감성은 거의 천재성의 절정과 같은 예술의 강렬함을 보여준다. 예술을 자신의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놀랍도록 집요하고 구체적인 노력을 보여주는 위대한 무성영화는 나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다. 예컨대, 모든 세계를 제어하려는 과대망상은 초창기 영화에서 떼어낼 수 없는 감정이다. 이런 영화에서, 우리는 모든 가시적 요소의 통제를 통해 절대적으로 경탄할만한 드라마적 폭력의 순수함을 만들어 내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그리피스의 [부러진 꽃](Broken Blossoms, 1919)과 같은 작품을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이다.

정식 시네필도, 조직된 시네필도 아닌데, 왜 이 시기부터 영화에 대해 글을 쓰기로 했나?
나는 돈만 밝히는 무신론자를 선교하기 위해 ≪새로운 포도주≫라는 가톨릭 잡지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잡지는 고등사범학교 내의 가톨릭 청년들을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친구였고 이 친구들이 나에게 글을 쓰도록 요청했다. 글쓰기 덕분에, 내가 배웠던 점은 취향의 다양성을 통해 유연하고 폭넓은 지식의 전체 안에서 각자의 생각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철학자인 내가 감히 영화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영화 전문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가 내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포도주≫의 지면에, 나는 처음에 셍고르(Leopold Sedar Senghor) 작품에 대한 글을 통해 시에 대해서, 바이로이트(Bayreuth) 여행 보고서를 통해 음악과 오페라에 대해서, 브라상스(Georges Brassens)에 대한 글을 통해 노래에 대해서 그리고 당연히 정치에 대해서 글을 썼다. 이런 다양한 글을 쓴 이유는 특별히 영화에 대해서만 글을 쓰고자 하지 않았으며, 다방면으로 걸쳐 있는 것은 지양하되 관심을 끄는 모든 것들에 대해 글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을 실질적으로 발견하고자 했다. 이 모든 것의 이면에는 당시 나의 우상인 사르트르(Jean-Paul Sartre), 그의 에세이 모음집인 [상황들](Situations), 그의 발언들이 있었다는 점을 반드시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다방면에 걸친 철학적 관심이 때때로 극단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반대로 이런 관심은 이전의 관심과 취향의 행위에서 벗어난 철학적 발상에 도움이 되었다. 철학의 여정은 서로 다른 관점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 내 경우에는 영화에서부터 시작해 음악과 극단적인 정치 활동을 거쳐 현대수학에 이른다. 바로 이런 다양한 측면을 가진 요소가 철학의 가능성을 창조한다. 영화에 대한 글쓰기는 ≪새로운 포도주≫에서 20살부터 시작해 그 후에 몇 번 중단되었지만, 자연스럽게 나의 철학적 경향의 한 요소처럼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강렬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동시대와 함께하는 영화의 특별한 측면은 나에게 매우 중요했고 지금도 아주 중요하다.

당신이 ≪새로운 포도주≫에 쓴 첫 번째 기사를 평해 본다면 우선 거기서 하나의 선언적인 시각이 파악되는데…
젊은이가 쓰는 글이 항상 그러하듯이, 내가 쓴 글도 예외는 아니다.

당신에게, 영화는 ‘인간의 현존’이라는 선언인가?
그것은 당시 내적 인본주의자, 다시 말해 실존주의자였던 내가 영화를 ‘문화’라고 부름으로써 내 나름대로 영화의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영화는 스스로의 직관성을 통해 증인이 되고 인간 경험의 매개가 된다. 영화는 인간 실존과 자유의지라는 보편적 가치에 도움이 되는 공식적 힘을 제공한다. 그 힘은 (다소 결핍되고, 독특하며, 혼란스럽게 존재하는 방식도 포함하여) 존재하고 선택하는 누군가의 존재 방식에 도움이 된다. 영화는 갑자기 “여기에 누군가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가장 동시대적 영화, 심지어 고다르조차도 이 법칙의 적용을 받는다. 예를 들어 [열정](Passion, 1982)에서, 인간의 현존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사람의 얼굴을 촬영하는 방법이 있다. 물론 대부분의 영화들은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소설에 대한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의 견해에 따르면, 소설의 임무는 가시적 세계를 정확하게 다루는 것이다. 이런 의무는 영화에서 더욱 강조된다. 이러한 사고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나쁜 영화에서 인간의 현존은 낭비되고 아무 이유 없이 동원된다. 그에 반해 좋은 영화에서는 아주 짧은 순간에서조차 인간의 현존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다르의 최근작인 [필름 소셜리즘](Film Socialisme, 2010]과 관련되어 나에게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가끔 “어! 당신이 영화에 등장했다는데 많이 보이지 않던데요!”라고 내게 말하곤 하는데, 나는 그들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을 때 단 몇 초 동안 나 자신이었던 나의 이미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이미지에서 내게 부여된 현존 방식에 만족한다. 그것이 단 몇 초 동안 지속된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고다르의 이미지는 나를 정확하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포도주≫에 기고한 이 주제는 다음과 같은 아주 유사한 어떤 것을 찾으려 했다. 말하자면 ‘영화 문화’이다. 다시 말해 수년 동안 봤던 영화들을 통해, 나는 영화 문화가 인간의 현존을 가시화하고 인간의 자유로운 실존을 확실하게 증명한다고 말하려고 했다.

첫 번째 글의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인 ‘영화와 다른 예술들 간의 상호침투’는 당신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썼는데…
상호침투는 영화의 본질적인 순수하지 못함과 관련이 있다. 영화를 다른 예술들과 밀접한 관계로 규정하는 ‘제7의 예술’이라는 명칭을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다른 예술들의 종결이라고 헤겔(G. W. Friedrich Hegel)이 말했을 것처럼, 영화는 다른 예술들의 축소판이 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영화는 예외 없이 다른 예술들과 관련이 있다. 영화와 미술과의 충돌은 격정적이고, 연극과의 관련성은 너무나 분명하고, 영화에서 음악의 존재는 필수적인 것 이상이고, 미장센의 고유한 요소로서 무용을 이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모든 예술은 영화를 관통한다. 영화는 다른 예술들을 단순히 이용하거나 섞는 것이 아니라, 완수하기 대단히 어려운 시련들을 도전하게끔 한다. 즉 영화가 다른 예술들을 이용해서 했던 것을 그들 스스로에 의해 달성하게끔 한다. 영화는 예술들을 특별한 감정의 힘 안에 배치하면서, 이들을 이용하고 확대한다. 영화 속에는 영화를 실제로 제7의 예술로 만드는 다른 예술들을 재발견하고 정복하는 힘이 있다. 비스콘티가 말러(Gustav Mahler)의 교향곡을 사용한 이후, 솔직히 모든 사람은 비스콘티의 영화를 통해서만 말러의 교향곡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를 통한 이러한 포착의 힘은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 일종의 도약이 있다. 영화는 순수하지 못한 동시에 강력한 형식적 힘으로 음악을 끌어올리고, 바로 이 힘이 음악에 새로운 영원성을 부여한다.

당신의 첫 번째 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인간 현존에 대한 긍정, 다른 예술들의 변형과 확대라는 영화에 대한 당신의 생각들이 놀라울 정도로 일관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50년 동안 철학을 하면서도 당신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이 글을 다시 읽으며 ‘아! 애석하게도 베르크손(Henri Bergson)이 옳았다! 우리의 생각은 절대 변하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주사위는 너무 일찍 던져진다. 그 후에야 우리는 생각을 발전시키고 확장하고 재배치한다. 영화의 두 가지 쟁점은 인간의 형상을 정확하게 다루고, 다른 예술들에 대해 지배적 관계를 갖는 것인데, 이것은 영화 작품과 나의 철학적 관계 속에서 변하지 않는 토대이다. 다른 쟁점들은 이후에 추가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영화가 상상의 여행이나 타자(他者)에 대한 사유의 도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예전에, 포드(John Ford)의 영화가 미국 농부들을, 미조구치의 영화가 일본 매춘부들을 정확하게 다루었다면, 오늘날의 영화는 중국의 공장들, 인도네시아의 어린 불량배들, 루마니아의 역사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 아르헨티나에서의 어려운 대인관계 등을 정확하게 다루고 있다. 영화는 각 나라의 아주 본질적이고 명확한 핵심을 제시한다. 이제는 노동자가 없다는 환상 속에 살고 있는 프랑스 사람들은 영화 덕분에 중국에 아직도 노동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뛰어난 중국 영화는 우리의 공장과 노동자들이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되돌아볼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세상에 대한 이런 증언은 영화 고유의 것이고, 어떠한 저널리즘적 르포르타주도 영화를 대신할 수 없다.

1950년대 후반을 지나 대략 15년 후의 당신과 영화 간의 관계는 사회 참여적 실천과 이념으로서의 정치로 나타난다. 1970년대 중반 ≪벼락 신문≫에 기고한 모든 글이 바로 이 책에 소개된다.
정치적 개입의 글들이기에, 전체적 논리는 다소 다르다. 스펙터클에 대한 전체적 논리의 관점에서, 우리는 ‘벼락’(Foudre) 이라는 문화 집단을 만들었다. 이 집단은 정치적 범주에서 출발하여 혹은 그 연장 선상에서, 스펙터클을 이해하고 홍보하기 위해 또는 반대로 그것을 고발하고 방해하기 위해 특정 스펙터클에 개입하여 의견을 개진했다.

바로 이것이 ≪벼락 신문≫의 부제인 ‘영화와 문화 속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의 개입을 위한 잡지’란 의미인가…
당시는 중요 잡지들과 유명 인물들이 참여하는 시대적 현상이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 심지어 고다르처럼 상징적인 감독도 마오이즘과 문화대혁명으로 전향했다. 이것은 전반적인 흐름이었고, 이 운동의 내부에서 영화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영화는 대중 예술이었으며 사회 참여적 맥락에서 이용 가능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 수반되는 이런 사회 참여적 활동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혹은 심지어 영화의 일부분만을 다루는 잡지들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한편으로, 우리는 꾸준히 비평 작업을 했는데, 이 비평은 기존의 사고를 바꾸거나 극도로 분열을 초래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 우리는 사회 참여적 실천 그 자체를 위해 영화 상영을 했다. 그리고 사회 참여적 실천에 걸맞은 영화들을 지지하는 논리를 밀어붙였다. 이런 이유로 소련 영화의 사례들이 당시에 새로운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정치와 다양하게 보완적 관계에 놓인 영화가 인류의 역사에서, 요컨대 1920년대에 놀랍도록 중요한 방식으로 이미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68’혁명 시기에는 역사의 재인식이라는 영역이 있었고, 소련 영화는 거기에 놀랄 만큼 적합했다. 이런 혁명의 시기들은 프랑스 혁명가들이 어김없이 항상 로마인들을 참조하는 것처럼, 역설적이게도 언제나 위대한 고대를 모방하는 시기였다. 우리는 이전의 일련의 서사시, 소련, 중국, 심지어 프랑스 혁명과 레지스탕스를 참조했다. 영화는 이런 전설의 재인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이미 선조들, 지식, 기준들이 있었고 또한 영화 작품들의 실질적인 활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중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의 교육적 상영을 실행하고 있었음에도 ≪벼락 신문≫은 사회 참여 경향의 감독 집단들과 실제로 관련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활동들 중 앞에서 언급한 첫 번째 활동인 비평 개념의 생산, 영화 작품에 대한 사회 참여적 판단을 위한 결정의 역할에 집중했다. 그것은 대체로 엄청나게 긴 토론을 동반하는 평가 작업이었다. ≪벼락 신문≫은 이런 토론을 모두 기술하지 않고, 종합된 결론만 발표했다. 순간에 대한 혼란스러운 콘텍스트 속에서, 어떤 영화 작품이 진보적인가 혹은 반동적인가 하는 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것은 복잡한 문제다. 사람들이 영화에 완전히 몰입되어, 동일한 기준, 해석으로 영화를 보기 때문에, 이런 상황은 복잡하다. 특히 쟁점이 된 작품이 정치적 소재와 밀접한 경우에는 문제가 더욱 복잡했다. 정치가 동시대에 밀접할수록 뉘앙스는 중요하다. 큰 틀에서 봤을 때 외관상 유사하게 보이는 두 집단이 가까이에서 보면 철천지원수일 수 있다. 사소한 것들이 그들 사이를 격렬하게 반목시킬 수 있고, 영화와 비평의 경우에서의 실질적 실행은 언제나 세부 사항에서 문제가 된다. 사람들은 언제나 소집단들이 터무니없는 세부 사항 때문에 분열한다고 이야기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올바른 역사적 관점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즉 당시의 소집단들에게 있어, 세부사항들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 토론과 논쟁의 본질 그 자체였다. 오늘날에는 이런 집단들을 비웃을 수 있다. 심지어 나도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안의 내부에 있을 때는 세부 사항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분야에서도, 우리는 이런 사실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부부 생활에서는 미세한 세부 사항으로 인해 극단적인 폭력이 초래될 수 있다. 당시 우리는 어떤 면에서 보면 연인들이 사랑싸움하는 것처럼 정치 활동을 했다.

영화에 관한 이러한 정치적 논쟁들은 당시에 매우 격렬했다. 이것이 실제로는 비평을 하는 또 다른 방식이었는가?
물론 진정한 토론 없는, 중요한 실천들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기로는 실제로 아주 논증적이고 끝까지 밀어붙인 토의들이 있었다. 우리는 영화를 계속해서 봤고, 영화와 정치가 뒤섞이는 이런 논거의 성질은 비평적 토론에 해당한다.
---「영화는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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