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는 호기심 덩어리다. 세상이 모두 새롭고 신기해서 집 안 이곳저곳을 탐험하듯 누비며 다닌다. 우리 집은 어느 곳이나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아이가 궁금해하는 것은 다 살펴보고 만져 보고 들어 보고 맛보게 했다.
찬장이나 개수대 문을 끈으로 묶어 놓는 대신 원 없이 꺼내 놓고 놀게 했다. 아이들은 그릇들을 다 꺼내 탑처럼 쌓아 올리기도 하고 성처럼 길게 늘어놓기도 했다. 빈 찬장에 들어가 놀기도 했다. 아이는 꼭 포장 상자에 들어 있는 인형같이 귀여웠다. 유리그릇도 어른이 곁에서 지켜 주면 아주 좋은 장난감이다. 깨지는 순간 금방 흉기로 돌변하는 유리만 따로 치워 놓고 다양한 모양과 크기, 색깔, 재질의 그릇을 종류대로 늘어놓아 젓가락으로 두드려 소리를 내 준다. 쇠 젓가락일 때와 나무젓가락일 때 다른 소리가 나고 그릇에 물이 담겨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소리가 다르다. '난타'가 따로 없다.
화장품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궁금해하는데, 화장품은 아이들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으로 자꾸 올라가 욕구는 계속 충족되지 않는다. 아이들과 발라 보고 칠해 보고 냄새 맡아 보았다. 다 알아보자 화장품은 피난 갈 필요 없이 낮은 화장대에서도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아이들은 좁은 공간을 좋아해서 이불장에 들어가 노는 것도 즐긴다. 아침저녁 이불을 넣고 꺼낼 때 아이들 눈에 띄면 그날은 온 이불이 다 밖으로 쫓겨나와 텐트가 되고 장막이 된다. 이불 썰매를 만들어 아이들을 태우기도 하고, 흥이 더하면 얇은 홑이불로 망태기를 만들어 아이를 그 안에 담고 산타 할아버지처럼 메고 다녔다. 장롱 안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했다. 때로는 내장 꺼내 놓은 것처럼 이불이 다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 볼썽사나웠지만, 아이들도 하고 싶은 게 있고 그것이 그네들의 일상인 것을 어쩌랴. 치울 때도 힘들일 필요 없다. '치우는 놀이'를 하면 금세 정리된다. 방법은 간단하다. '누가 빨리 치우나 시작!' 하고 게임을 하듯 치우면 그만이다.
- p. 70
홍원이는 여섯 살 때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아이를 키워 보니 잠깐 그럴 때가 있다. 다른 집 아이들도 그렇고. 생각은 무척 빨리 들어가는데 말이 따라 주지 않아서 나타나는 현상인 듯했다. 보통 아이들은 눈치 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금방 지나가는데 홍원이는 석 달이 지나도록 말을 더듬었다. 말을 급하게 하면 더욱 그랬다. 아이가 긴장하면 더 나빠질까 봐 모르는 척, 아무 일도 없는 듯 아이를 대했다. 다만 아이가 무슨 소리를 하면 다른 일을 하다가다도 멈추고 아이 눈을 보며 말을 열심히 들었다.
'엄마가 얼마든지 들어 줄 테니 천천히 잘 말하라'는 맘으로. 그런 데도 별 진전이 없었다. 하루는 미장원에서 손자를 데리고 온 이웃 할머니께서 한마디로 딱 잘라 "애 말더듬이구만" 하셨다. 정신이 번쩍 났다. 맞아, 애 말더듬이 맞아. 더 오래 끌어선 안 되겠다 생각하고 그날부터 만사 다 제치고 아이의 말씨 바로잡기에 온 마음을 집중했다. 아이가 엄마를 보러오지 않아도 볼 수 있도록 곁을 지켰다.
아이가 말을 시작하면 마치 말들을 준비를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응대했다. 아이가 불안해 말을 끊을까봐 될 수 있으면 참견도 안했고 많이 더듬으면 한 마디 정도 거들었다. "응. 홍원아, 엄마가 듣고 있어. 언제까지나 홍원이 말 다 들을 거야. 아무리 오래 걸려도 괜찮아. 얼마든지. 그러니까 천천해 말해."
또박또박 천천히. 나는 내 말투가 달라진 걸 느꼈다. 아들을 보면서 내 말투는 어떤가 돌아보게 되었다. 빠르게 하던 말을 알맞은 속도로 하려 했고 내 말씨를 듣기 좋게 바꾸려 노력했다. 내가 아이를 키우는 것 같지만 천만에다. 아이가 나를 키운다. 부모는 아이를 낳아 기르며 배려를 배운다. 희생도 배우고 용기도 배운다. 참을성도 기른다. 어려운 일을 겪으면 한꺼번에 더 많이 배운다. 아이가 말을 더듬자 여러 가지를 되돌아보게 되었고 나는 훌쩍 자랐다.
-p. 62
두 아이를 낳았을 때 나는 학생 신분이어서 책을 많이 읽어야 했지만 학업을 끝낸 후에도 주부로서의 역할, 환경문제, 농업 현실, 공동체 운동에 관심이 많아 그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래서 주변에 항상 책이 있었다. 책은 들여다보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책으로 성을 쌓기도 하고 탑을 만들기도 하는 등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책을 통해 내가 너무나 많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책 속의 비밀을 알게 하고 싶었다.
- p.106
중3 태경이는 학원에 가지 않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동안 컴퓨터로 날마다 조금씩 수화를 배웠다. 수화를 어느 정도 익힌 다음에는 동생에게 가르쳐 비밀 얘기는 다 그것으로 나눴다. 가만 보니 엘리베이터 같은 조용해야 할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는 수단으로 썼다. 아주 쓸모 있어 보였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도 가르쳐 가끔 수업 중에 밀담을 나누는 간 큰 학생이 되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반 아이들 모두에게 수화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수화를 조금 알고 나서는 컴퓨터로 점자를 배웠다. 아이에게 왜 점자를 배우냐니까, 밤에 책 읽다가 잠들 때 불 끄는 게 귀찮으니까 점자 책을 가슴에 안고 읽다가 잠들겠다는 거였다.
학교 방과 후 교실의 경험도 우리 아이들에겐 아주 소중했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던 반원초등학교에서는 수학 책을 일곱 권이나 내신 선생님이 무료로 아이들에게 방과 후 수업을 하셨는데 학생들을 다 학원에 빼앗겨 그야말로 파리를 날렸었다. 학교에 계신 정규교육을 받은 선생님은 도외시하고 학교 박에서 교사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아 그랬다. 학년에 상관없이 학생을 뽑아서 우리 아이들은 둘 다 그 선생님과 공부를 했다. 나는 선생님의 대여섯 명밖에 안 되는 귀한 학생들 가운데 두 명이나 보낸 귀하신 몸이라 선생님께 정말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황송하게도 가끔 선생님께 감사 편지를 받기도 했다.
- pp. 10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