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얻은 행복은 대가를 요구했다. 네이선과 첫 키스를 나눈 순간부터 티아는 그것을 예감했다. 그와 사랑에 빠져 보낸 한 해 내내 그녀는 벌이 내리길 기다렸고, 실제로 어떤 결말이 다가오든 감내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8쪽)
한 달 뒤, 아기가 딸임을 알게 된 캐롤라인과 피터는 이름을 서배너(Savannah)로 짓겠다고 티아에게 말했다. 바보 같은 이름이었다. 그래서 티아는 배 속의 아기를 아너(Honor)라고 불렀다. 엄마의 미들네임이었는데, 바보같이 들리긴 마찬가지였지만 아기를 낳은 후에도 그렇게 부르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서배너란 이름보다는 아너가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브리트니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만약 병중인 엄마 때문에 바쁘지만 않았다면 티아는 배 속 아기를 위해 다른 양부모를 찾아봤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선택을 못마땅해하며 엄마가 입원해 있는 호스피스 병원 복도를 걷던 티아는 비틀거리다 음식 카트와 부딪혔다. 요즘은 노상 이 모양이었다. 너무 자주 소변이 마려웠고, 생활은 거의 칩거 상태였다. 네이선이 찾아 주기만을 기다리던 마음은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무쳤다. 자신의 불룩한 배를 쓰다듬을 때마다 네이선을 애무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슬픔을 증오로 바꾸려고 애써 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18쪽)
“아기를 포기하는 건 네 다리를 자르는 거나 다름없어. 왜냐하면 절름발이 인생이 될 테니까.”
티아는 식탁 위에 펼쳐 놓은 사진들 속에서 딸의 얼굴을 살펴보며 엄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을 들을 땐 엄마가 잔인하게 느껴졌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딸을 깨우쳐 주려고 그랬음을 알 수 있었다.
티아는 사진들을 살펴보느라고 일요판 〈보스턴 글로브〉는 무시했다. 해마다 딸의 생일인 3월이 오면 캐롤라인 피츠제럴드라는 여자로부터 상냥한 메모와 함께 다섯 장의 사진이 우송되어 오곤 했다. 티아는 지금 다섯 살 된 딸 아너의 사진들을 보고 있었다. 분홍색 이불 위에 다리를 걸치고 앉아 있는 모습, 빨간 벨벳 치마를 입은모습, 통통한 다리로 그네를 타는 모습, 인형을 안고 있는 모습, 해변에서 모래성을 쌓는 모습. 이 사진들은 어제 소포로 도착하자 식탁 위에 펼쳐진 뒤 줄곧 이대로 있었고, 티아는 사진에 담긴 모습들을 머릿속에 되새기며 몇 번씩이나 보고 또 보았다. 아너의 생일인 3월이 올 때마다 사진들이 도착했고, 그때마다 딸을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처럼 치솟았다. 하필이면 엄마의 기일도 이때 겹쳤다.
모성애에 대한 티아의 환상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다. 단순히 신체적이고 일상적인 엄마 노릇을 통한 위안을 얻고 싶은 것뿐이었다. 우유를 먹이고 딸의 머리를 땋아 주는 것과 같은 엄마의 일상적인 일들이 이젠 그녀의 몽상이 되었다. 이런 간절한 육친의 정을 딸은 결코 느끼지 못할 것이었다. 아너에 대한 애틋한 정을 느낄 때면 가슴속에서 뜨거운 사랑이 우러나와 그대로 딸에게 전해질 것만 같았다.
티아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인형을 안은 아너의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딸의 얼굴에서 그녀 자신과 네이선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아너의 숱 많고 노르스름한 머리카락과 뚜렷한 이목구비는 네이선을 닮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소녀의 강렬한 눈빛만큼은 티아 자신을 닮아 있었다. 그녀는 사진을 눈앞에 바짝 당겨 살펴보았지만 어린 딸의 표정을 읽을 순 없었다.
가끔 딸에 대한 그리움을 지워 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아픔은 오히려 더했다. 그리움은 딸과 자신을 연결하는 끈이었고, 그것을 끊어 버릴 수가 없었다. (46~47쪽)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가슴 아팠던 일도, 불신도, 남편이 귀가할 때마다 바람피운 흔적을 살피던 일도.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줄리엣은 남편을 줄곧 의심해 왔다. 그는 단지 타락의 시기는 끝났다고 선언한 자신의 거짓말에 안도하고 있을 뿐인 건 아닐까, 생각하면서. 단절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아이들, 그들이 모두 함께 쌓아 온 세계, 그리고 사랑. 네이선에 대한 사랑을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용서하는 것만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고비를 넘겼고 남편을 믿기로 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자신에게 ‘왜?’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고 있었다. 왜 그는 다른 여자와 잤을까? 그녀가 남편을 숭배했던 것은 그가 정직하고 분별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티아가 가진 커다란 눈이 네이선에게 사랑과 보호를 갈구했을지도 몰랐다. 너무 지나치게 유능한 아내한테 질려 숨이 막힐 지경이었던 네이선에게 티아는 유일한 탈출구였음이 분명했다. 완벽한 줄리엣. 가족에게 맛있는 요리를 계속 제공하고, 두 아들을 잘 키우고, 집 안을 항상 깔끔하게 유지하는 여자. 심지어 요즘은 남편보다 돈도 더 많이 번다. 네이선이 자존심 때문에 티아에게로 돌아섰다는 생각이 들자 줄리엣은 미칠 것만 같았다. (90~91쪽)
티아는 가끔 자신의 인생을 네이선이 전부 마셔 버린 것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다시는 그 잔을 채울 수 없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눈 뒤에 몇 시간씩이나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다. 네이선의 부모가 헝가리에서 탈출하던 때의 얘기를 들으며 티아는 역사책 속에서만 읽던 이야기들이 삼차원의 세계로 튀어나온 것처럼 느껴졌으며, 그녀가 결코 알 수 없었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어린 시절의 꿈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번은 네이선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웃지 마세요. 난 어릴 때 엘리자베스 블랙웰처럼 되고 싶었어요. 미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겠다는 게 아니라, 그런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단 뜻이에요. 인간의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죠.”
네이선은 그녀의 말을 비웃지 않았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중략)
네이선은 돌아누워 얼굴이 서로 맞닿을 만큼 그녀를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넌 뭐든지 할 수 있어. 능력 있고 영리한 여자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먼저 네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일이야.”
그런 조언은 티아가 원했던 게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비참한 현실에서 건져 올려 줄 커다란 손을 기대했다. (245~247쪽)
내가 이 여자를 사랑했던가, 하고 그는 티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녀는 오 년 전 스물네 살이었을 때 갑자기 그의 삶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국적이고 섹시하면서도 그의 연구 활동에 활기를 불어넣는 전혀 다른 세상의 여자처럼 느껴졌다. 그녀와 잘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하지만 일단 자고 나자, 그가 내세울 변명이라곤 오로지 욕망뿐이었다. 그녀는 네이선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녀가 네이선과 사랑에 빠지자, 그도 단지 욕망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같이 자는 거라고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래야만 자신의 그런 행동이 덜 비열하게 느껴졌다. (357쪽)
“아니, 이건 달라요. 뚜껑 문제가 아니라 엄마로서의 자질 문제죠. 난 오늘 저녁만 이런 게 아니라 항상 이 모양이잖아요.”
피터는 그녀의 양 어깨에 손을 올리곤 꼭 잡아 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신은 훌륭한 엄마야.”
“내 말 잘 들어요. 이게 바로 나라고요. 그래도 나한테 집에서 살림이나 하며 딸을 잘 키워 달란 말을 하고 싶어요?”
캐롤라인은 남편의 손을 뿌리쳤다.
“난 말예요, 지저분해지면 못 참아요. 아이랑 노는 것도 너무 지겹고, 비티 인형 따윈 벽에 내던져 버리고 싶어요. 쿠키를 굽기도 싫고, 아이들과 놀기로 약속하는 것도 귀찮고, 입양 관련 서류는 다시 들여다보기도 싫어요.”
“여보, 다른 엄마들을 만나 보면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게 될 거야. 내 여동생들을 좀 만나 봐.”
캐롤라인은 차마 해선 안 될 말인 줄 알면서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서배너와 함께 있으면 돌아 버릴 것 같아요. 지겨워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엄마 노릇을 하려니 미칠 것만 같아. 내가 아이를 망치고 있다고요. 아이한테도 못할 짓이에요.” (365~366쪽)
“알아요. 믿고요. 하지만 문제가 있어요. 당신이 티아와 한 짓은 용서할 수 있어도, 서배너 문제까지 용서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서배너 문제라니?”
네이선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티아에게 임신시킬 생각은 난 꿈에도 해 본 적 없어. 솔직히 난 그 여자가 나를 되돌아오게 하려고 서배너를 이용한 게 아닐까 의심해. 물론 그런다고 난 돌아가지 않아.”
“당신은 나와 함께 있었지만 날 신뢰하지 않았어요.”
“무슨 뜻이야?”
줄리엣은 일어나 앉더니 두 손으로 양쪽 무릎을 누르며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당신은 자기 딸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어떤 남자가 자기 자식을 부인한단 말예요?”
“그건 당신과 아이들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게 두 번째 실수였어요. 날 믿고 얘기했어야죠, 네이선. 그때 정직하게 고백했다면 우린 기회가 있었을 거야.” (448쪽)
“남편을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당신들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데.”
캐롤라인은 시멘트 바닥에 두 발을 내려놓은 뒤 줄리엣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도 난 네이선과 서배너를 만나 봤잖아요. 그는 괴물이 아니에요. 당신과 티아한테 한 행동으로 판단하면 완벽한 남자는 절대 아니죠. 그가 거짓말한 건 알고 있지만, 단지 그것 때문에 남편과 갈라설 자신이 있나요?”
캐롤라인은 손가락을 하나 들어 줄리엣의 대꾸를 막았다.
“이것만은 지금 말해 주고 싶군요. 난 엄마가 되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졌어요. 이런 사실을 피터가 알고 있었다면 아마 나와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 누구에게나 잊어버리고 싶고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 있는 법이죠. 끔찍해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 말예요.”
캐롤라인은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올렸다.
“네이선에겐 티아의 임신이 아마 그런 일이었을 거예요.” (482~4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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