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87년에 이 책과 같은 제목으로 도서출판 정음사에서 책을 펴낸 바 있다. 그 책의 내용은 1. 이순신의 거북선, 2. 토함산의 석굴, 3. 신라시대의 범종, 4. 경주의 첨성대 등 4편으로 되어 있으며 토함산의 석굴 편에는 동해구 대왕암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번에 다시 펴내는 이 책에서는 거기에 월성(月城)과 재성(在城) 편을 추가하였다.
이상의 주제는 모두 우리의 국보 또는 국보급 문화유산에 관한 이야기이며, 각 편의 이야기 골격들은 그 동안 내가 『역사학보』에 발표했던 논문을 토대로 한 것이다. 토함산의 석굴 편은 1986년 9월 「감불(龕佛)을 포함한 제상(諸像)과 석굴법당의 교리적 해석」이라는 논문으로, 월성과 재성 편은 1989년 9월 「인왕동 왕궁의 건조시기에 대하여」라는 논문으로, 경주의 첨성대 편은 1974년 12월 「첨성대에 관한 제설의 검토」라는 논문으로, 신라시대의 범종 편은 1972년 6월 「신라 초기에 형성된 소위 조선종 형식의 발생과정과 조계사종이 차지하는 위치」라는 논문으로, 그리고 이순신의 거북선 편은 1976년 9월 「거북선 구조에 대한 재검토」라는 논문으로 발표한 내용들을 토대로 한 것이다.
『유물의 재발견』에는 대단히 많은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져 있다. 그 중에서 대왕암과 첨성대는 근년에 제기된 잘못된 학설들을 바로잡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 밖의 것들 중에는 나 자신이 처음으로 발견한 여러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이에 대한 약간의 예를 든다면,
1. 일찍이 석굴 천장 앞쪽에 광창(光窓)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2. 석굴 안에 조각되어 있는 불상들에 대해 그 역할을 모두 알아낼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3. 쥐(子), 소(丑), 범(寅), 토끼(卯) 등의 순서로 되어 있는 12지의 동물들은 불교의 12지연기(十二支緣起)를 상징하는 것이며 우리의 일상생활과도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나 그 유래와 뜻에 대해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알고 있지 못했다.
4.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부르는 경주 인왕동의 왕궁터는 신라의 월성터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그 곳은 월성터가 아니라 재성(在城)이라는 이름의 제2 왕궁터임을 밝힐 수 있었다. 5. 범종은 소리를 내기 위한 일종의 악기이므로 제조기술상의 혁신에 따라서는 형식상에 있어서도 돌연변이적 변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일찍이 그러한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본 사람은 없었다.
6. 거북선에 대하여서는 간단히 몇 마디로 요약해 설명할 수 없으나 이에 관하여서도 위 사실들과 맞먹는 여러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내었다.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유산과 유물들에 대하여 종전에 밝혀내지 못한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냈다는 것은 그만큼 기존 학설과는 큰 마찰의 소지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나의 학설은 모두가 기존 학설에 대한 반론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학문의 발달이란 학설의 대립과 이의 극복과정을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 자신은 이 책의 내용들이 지니고 있는 논쟁적 성격에 대해서는 불가피한 긍정적인 측면이라고 자부하고 싶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28년 전인 1969년에 석굴문제에 관해서만 단 한번의 논쟁이 있었을 뿐 그 밖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논문 발표 이후 20여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볼 만한 반론이 제기된 바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자신이 제기한 여러 학설과 문제점들에 대해서 활발한 반론이 있기를 갈망하며, 이러한 학설적 대립을 통해서 해당 문화유산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 하루속히 정립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아울러 문화유산의 보존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정부 당국자들이 문화재 보존의 문제와 직결되는 학문적 성과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시책(施策) 면에 반영해 달라는 절실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예로 석굴문제에 관하여서는 1969년에 처음 나의 논문 발표가 있은 후로, 즉 그 해 5월호 『신동아』지에 실린 「석굴 보존의 위기, 석굴 수리는 개악이었다」라는 제하의 나의 글, 그리고 『신동아』 7월호와 『월간 중앙』 7월호에 동시에 실린 신영훈(申榮勳) 씨 및 문명대(文明大) 씨의 석굴 수리공사를 맡아서 한 황수영(黃壽永) 씨를 대신한 반론들, 또 이에 대해 『신동아』 8월호에 실린 나의 재반론 등을 통하여 석굴 보존상의 치명적인 문제점과 그 극복책이 모두 분명히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밀폐 구조의 강요에 의한 습기문제로 인하여 보존이 위태로운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봉덕사신종보다도 더 귀중한 유물인 조계사종은 원래 올바르게 국보로 지정되어 있던 것을 황수영 씨에 의한 그릇된 감식으로 이를 해제함으로써 그에 대한 적절한 보호조치가 소홀히 되어오던 나머지 현재에는 그 행방조차 알 수 없는 상태에 있다. 또한 자연석에 불과한 대왕암에 대해서는 역시 황수영 씨에 의하여 그것이 세계 유일의 인공적인 수증왕릉이라 하여 중요사적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는 실정이고, 첨성대에 대해서도 정지(整地)공사 때에 흙이 남았다 하여 바닥을 돋움으로써 기단석을 땅 속에 묻히게 해놓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실물 크기의 거북선을 만들 때에는 원형 구조 파악의 잘못으로 그 복원이 잘못되어 시속 5km의 속도도 제대로 낼 수 없는 열등한 배로 만들어놓고 있다. 사실 내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게 된 동기도 바로 이상과 같은 석굴 등 시급한 보존문제들을 해결해보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나의 연구들이 발표된 후 20여 년이 지나도록 정부 당국자들이 복지부동(伏地不動)하여 문화재 관리의 시책 면에 이를 반영할 뜻을 보이지 않고 있는 점은 참으로 유감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저자의 말
그런데 종 밑에 구멍이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지금까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오늘날 종로의 보신각을 비롯하여 많은 종각들은 아예 2층으로 지어져 있으며 종은 2층에 있고 종 밑에는 구멍이 뚫어져 있다. 2층에 있으니까 소리는 멀리까지 가게 되고, 구멍이 있으니까 밑에서도 크게 울리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종소리는 광선과 같이 직진만 하는 것이 아니므로 2층 정도의 높이에 있다 하여 더 멀리까지 들리는 것은 아니며, 만약의 경우 화재가 난다든지 또는 종이 떨어진다면 파손될 우려만 커지게 된다. 깨어지면 또다시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설사 고종(古鐘)이 아닐지라도 그것을 보다 더 안전하게 그리고 또 파손되지 않도록 잘 보존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종이란 깨어질 수 있는 것이고, 또 밑에 두어도 좋은 것인데 구태여 높은 곳에 올려놓을 필요는 없다. 사람은 흔히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지만 종은 바닥에 가까운 평범한 곳이 더 안전하고 좋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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