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더 얼마나 내릴 작정일까.
6시가 넘어서부터 다시금 내리기 시작했던 눈은 그쳤다 내리기를 반복하며 오래도록 꼬리를 물고 있었다.
추위가 익숙해지도록 이 자리에 홀로 서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녀는 스스로도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몇 시나 되었을까.
밀랍 인형처럼 멍하니 정면 어디쯤을 바라보던 그녀는 코트 주머니에 넣었던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7시임을 확인한 직후 휴대전화가 꺼져버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후로 대여섯 번은 꺼진 휴대전화를 부질없이 들여다본 것 같다.
채원은 하릴없이 난간에 발끝을 툭툭 털었다. 부츠 앞코에 쌓인 눈이 아래로 맥없이 떨어졌다.
아, 괜히 움직였나. 가죽부츠 안에서 꽁꽁 언 발가락이 딱딱한 난간에 부딪히며 찌릿하게 통증이 일었다.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에 찔끔 눈물이 났다. 가만히 있을 땐 몰랐는데 발끝 하나 난간에 털었다고 온몸이 저릿해졌다.
“하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찢어질 듯 아픈데 느닷없이 웃음이 났다. 이 추운 날 검은 스타킹에 한 뼘 만큼 짧은 모직스커트 달랑 하나로 감싼 다리도 우습고, 방한부츠도 아닌 굽 높은 가죽부츠 속에 움츠리고 있는 발가락도 우습고, 보온성 따위 개나 준 울 롱코트 안에서 불쌍하게 떨고 있는 몸뚱이도 우스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새삼스럽게, 뭐 얼마나 예뻐 보이겠다고 이 추운 날에 이따위로 차려입었는지.
“미친…….”
그래, 미친 짓이다. 이게 미친 짓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이다. ‘1분만 더, 2분만 더.’ 이딴 미련 따위는 휴대전화가 꺼져버리던 그 순간 버렸어야 했다. 아니 그 전, 휴대전화로 시간만 확인하며 배터리를 잡아먹을 그 시간에 그녀답게 전화를 걸었어야 했다. 6시가 지난 지가 언제인데 왜 안 오냐고, 추워 죽겠으니까 빨리 튀어오라고. 그래, 그랬어야 그녀였다.
나다운 것, 은채원다운 것. 왜 바보처럼 그것을 잊게 돼버렸을까. 지난 1년 반 동안 난 도대체 왜, 이런 미련한 바보가 돼버린 걸까.
고집스럽게 난간을 향해 있던 부츠 앞코가 그제야 돌아섰다. 옥상을 가로질렀던 하나의 발자국은 후에 내린 눈으로 다시 얇은 막을 덮고 있었다. 여전히 하나뿐인 발자국이 그렇게도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채원은 자신이 남긴 발자국 위를 천천히 걸었다.
그때였다. 옥상 문 너머 계단을 밟는 소리, 그 다급하게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채원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발소리가 바로 문 뒤에 닿았음을 직감했을 때, 바닥에 박혀 있던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정면의 문으로 향했다.
멈춘 발소리와 더불어 옥상의 철문이 지체 없이 벌컥 열렸다. 가장 먼저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칠게 몰아쉬는 뜨거운 숨결이 찬 공기와 만나 뿌옇게 흩어지는 모습이었다.
“너 도대체!”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화가 난 얼굴로 자신의 패딩점퍼를 벗으며 저벅저벅 다가오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의 패딩점퍼가 순식간에 채원의 몸을 휘감았다. 커다란 두 손은 작은 얼굴을 덥석 감쌌다.
“계속 여기에 있었던 거야? 전화는 왜 꺼져 있어? 옷은 또 왜 이렇게 얇게 입고! 하, 미친다, 내가 너 때문에.”
그는 채원의 차가운 머리통을 꽉 끌어안았다. 우수수 쏟아지는 말들이 채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은 ‘따뜻하네. 빌어먹을.’ 단지 그뿐이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이 꿈을 꾸듯 현실감 없는 이상한 느낌은 뭐란 말인가.
“5분이라도 늦으면 연락을 했어야지. 안 오면 갔어야지. 도대체 왜 이 시간까지! 지금이 몇 신 줄은 알아?”
한참을 뛰어온 모양인지 볼에 닿은 그의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그 심장에서부터 울리는 목소리엔 당혹과 미안함, 주체 못할 화가 가득 담겨 있었다. 채원은 그의 품 안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변함없는 향기, 변함없는 목소리, 따뜻한 온기도 그대로인데…… 열 달은 족히 됐음직한 시간이 흐른 후 안긴 그의 품은 어딘지 낯설었다. 역시 꿈인가, 싶을 만큼.
“미안하다. 깜빡 잊고 있었어. 오늘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단 말에 채원은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다. 차라리 피곤해서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고 했다면 이보단 나았을까. 자신은 그토록 기다려온 오늘인데, 오늘을 잊은 그를 기다리며 추위에 얼어버린 몸뚱이가 조금, 비참해졌다.
“괜찮아? 온몸이 얼음이네. 어디라도 들어가자. 몸부터 녹여.”
자신의 패딩점퍼를 꼼꼼히 여미며 채원의 얼굴을 살피던 그는 차가운 그녀의 손을 쥐었다. 한 발짝 앞선 그의 커다란 등을 보며 끌리듯 몇 발자국을 따르던 채원은 얼마 못 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그가 고개를 돌렸다. 채원은 그의 큰 손아귀에 잡힌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불편하다. 맞잡은 손의 모습도, 느낌도 이상하게 불편하다. 난 내가 아니고, 넌 네가 아닌 것만 같이…….
“채원아.”
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참 많이도 설렜었다. 4년을 한결같이, 단지 이름만 불러주어도 행복했었다.
그런데 왜, 네게 불리는 내 이름마저도 이렇게 어색한 걸까.
“은채원. 너 괜찮아?”
다시 한 발짝을 다가와 선 그는 걱정스레 채원의 안색을 살폈다. 고집스럽게 밑으로만 향해 있던 채원의 시선이 그제야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참 오랜만이었다. 브라운관 너머의 현실성 없는 모습이 아닌, 이 얼굴을 코앞에 마주하는 것이.
이곳 옥상정원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 지난봄이었는데, 다시 만난 그들은 겨울의 눈밭 위에 서 있다.
“너무 달라서…… 당황스럽네.”
굳게 다물렸던 그녀의 입술이 근근이 열렸다.
“뭐?”
의미를 되묻는 그의 눈동자에 그녀의 굳은 얼굴이 고스란히 비쳤다.
“생각했던 기분이 아니라서, 내가 지금 무척…… 당황스러워.”
그를 눈앞에 두고 볼 수만 있다면 지난 몇 달간의 외로움과 불안쯤은 가실 거라 생각했었다. 가깝고도 먼 그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일이 너무도 외롭고 힘들어 하루에도 몇 번씩 이별을 생각했지만 그 믿음 하나로 버티고 견뎠다. 그를 보고, 만지고, 안기면 다시 힘을 낼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
그런데, 막상 눈앞에 그를 두고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와의 사이에 여전히 두터운 브라운관이 있는 것마냥, 멀고도 불편한 느낌이었다.
“그게 지금 무슨…….”
“건아.”
그는 대답 대신 심각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표정과 말투가 평소와 다름을 그 역시 느꼈을 터였다.
“이건아…….”
반쯤 잠겨버린 목소리에 또 한 번 그의 이름이 담겼다. 당혹감과 미안함, 주체 못할 화, 그 복합적인 감정을 잠시 내려놓은 그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얘기해.”
채원은 그의 큰 손에 붙들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작은 손이 마치 자신의 마음 같았다. 어쩌지 못하고 그에게 잡혀 있는, 애타는 마음.
“…….”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오랜 시간 마음 깊은 곳에 묻어만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해야만 한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내면에서 놓아주지 않으려 하는 그 마지막 미련을 떼어내기 위해 그녀는 잠시 동안 홀로 무던히 애를 썼다.
그리고 얼마쯤의 정적을 이겨낸 후. 결국엔 그 아프고 쓰라린 덩어리가 입 밖으로 툭, 빠져나왔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