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의학에서는 음식이 중요하게 다루어졌지만 회화에서는 그 지위가 사뭇 초라했다. 16세기 이래로 예술 이론가와 학자 들은 정물화, 그중에서도 특히 음식을 다룬 정물화를 예술적 위계의 맨 아래에 놓았다. 위대한 문학 작품이나 음악, 무용, 영화 중에서 음식을 찬미한 작품들이 얼마나 많은가? 간혹 그 진지한 주제를 희극과 해학극으로 다룬 작품도 있다. 「사랑과 죽음」(1975년작)이라는 영화에서 우디 앨런은 나폴레옹과 웰링턴 공작의 경쟁심을 ‘쇠고기 웰링턴’과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의 페이스트리를 동원하여 재치 있게 표현한다. 이 두 음식에는 ‘사랑’이나 ‘죽음’에서 느껴지는 장중함과 위엄이 없다. 앨런이 음식을 다루는 것처럼 역사를 조작한다면 역사는 유쾌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것이 된다. 음식을 예술의 주제로 삼을 때의 문제점은 바로 그 ‘낯익음’이다. 우리는 사업을 하거나, 연애를 하거나, 행사나 의식을 치를 때 식사가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음식은 모든 사람이 늘 접하는 극도로 평범하고 진부한 것이어서 특별한 고려의 대상이 될 만한 가치가 없어 보인다. ---p.25-26 『음식과 예술』 중에서
대다수 서양인들의 식단에 육류가 자주 등장하게 된 19세기 이전까지 육류는 부자들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기에 고기를 먹지 말라는 교회의 명령은 완전히 비현실적이고 수사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순절의 율법에 따르면 고기뿐 아니라 짐승에게서 나온 식품 전부가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달걀, 버터, 우유, 치즈, 베이컨, 돼지기름 등 빈민의 식단에 맛을 가미해 주던 식품도 모두 금지되었다. 우유를 먹지 못하면 포리지를 끓일 수 없고, 동물의 지방과 치즈를 쓰지 못하면 빵에 바를 게 없으니 음식 맛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그 대용물로 마련된 올리브유, 생선, 각종 야채도 훌륭한 음식이었다. 그러나 빈민들은 싱싱한 생선보다는 소금에 절인 생선을 먹으며 육류 섭취 금지 기간을 견뎠다. 따라서 빵과 생선이 그려진 17세기 회화 작품을 볼 때는, 그 작품이 육류를 먹지 말고 고통을 견디며 정화하라는 종교적 명령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p.49 『제1장 시장 풍경』 중에서
스펜서의 그림 속 남자는 바닥에 흩어진 식품보다 체면을 잃은 것 때문에 기분이 상해 있다. 화가는 남편이 화난 이유가 식품에 대한 절박함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당연시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미국적인 시장 풍경은 아르첸이나 렘브란트, 체루티의 작품과는 사뭇 다르다. 스펜서의 19세기 장바구니에는 사철 식품이 모두 들어 있다. 국제적인 규모의 장거리 쇼핑망이 발달한 덕분에 웬만한 식품은 모두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소금이나 설탕에 절이거나 말리는 방법 등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낯익은 식품 보존법 외에도 통조림이나 냉동 같은 새로운 방법이 이미 존재했다. 이런 식품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도 운송되었는데, 병이나 깡통에 넣어 신속하고도 대규모로 식품을 보존하는 19세기 방식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스펜서의 남편이 도시 길바닥에 떨어뜨린 달걀, 양상추, 오이 등은 현지에서 재배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1850년대의 시카고 같은 대도시는 철도를 비롯한 수송 수단을 통해 단시간에 어떤 식품이든 가져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30∼40년 뒤에는 현대적인 슈퍼마켓도 등장하게 된다.
---p.81-82 『제1장 시장 풍경』 중에서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로 모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던 귀스타브 쿠르베도 서민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예를 들어 사과를 그리더라도 그는 농부들이 실제로 접하는 투박하고 울퉁불퉁하며 흙이 묻은 사과를 그렸는데, 이는 같은 시기에 앙리 팡탱 라투르가 묘사한 중산층 식탁을 장식하는 사과와는 사뭇 다르다. 또한 앙리 팡탱 라투르는 계급을 연상시키는 부속물로 우아한 도자기 찻잔을 함께 그렸다. 이처럼 음식 그림에는 사회의식이 크게 작용한다. 사회의식은 특히 그림의 배경이나 식사 장면과 관련되지만 음식을 준비하는 그림에도 반영되어 있다. 노동 계급은 캐비아나 꿩을 먹지 않고, 모네가 그린 것과 같은 값싸고 질긴 국거리 고기를 먹는다. 그리고 부자와 힘 있는 사람들은 양배추와 양파가 주재료로 들어간 음식을 즐겨 먹지 않는다. 때로는 식기 하나로 사회적 지위를 나타낼 수도 있다. 1920년대의 자본주의를 통박한 디에고 리베라의 「월스트리트 연회」는 복장이나 돈 가방이 아니더라도 샴페인 잔만으로 등장인물들이 방탕하게 사는 부자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술잔 하나로도 특별한 계급과 특별한 생활방식을 표현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클로드 모네의 초라한 도기 잔과 앙리 팡탱 라투르의 찻잔 역시 특정한 사회적 지위를 대변한다.
---p.127-129 『제2장 식사 준비』 중에서
수프에서 시작해 생선, 육류, 샐러드, 디저트, 과일과 치즈, 커피와 브랜디로 이어지는 오늘날의 식사 코스는 19세기가 되어서야 통용된 것이다. 오직 러시아에서만 코스마다 한두 가지 요리가 있었고, 식사는 각 음식이 하나씩 나오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식사하는 사람마다 하인이 한 명씩 시중을 들었다. 따라서 19세기에 이런 식의 식사 방법은 러시아식이라고 불렸다. 수세기 동안 상류층의 일반적인 식사 양식은 여러 가지 음식을 한꺼번에 식탁 위에 늘어놓고 먹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프랑스식이라고 불렸다. 식사의 각 ‘코스’는 여러 가지 요리를 포함하는 프랑스식으로 구성되었으며, 주인이 손님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또한 고기를 썰어 나누어 주는 일도 하인이 아니라 집주인의 몫이었다. 19세기 이전의 서양 메뉴에서 식사의 각 코스에 나오는 음식은 무척 다양했다. 19세기 이전에 치러졌던 연회의 사례를 보면 많은 면에서 현대의 식사와 크게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p.194 『제3장 식사 시간』 중에서
커피, 차, 초콜릿은 17세기에 유럽에 전해졌다. 교황 클레멘스 8세는 1594년에 처음으로 초콜릿을 마셨지만, 세비녜 부인은 1671년에도 초콜릿을 마시는 것이 새로운 유행이라고 말했다.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이탈리아의 경우 1645년, 영국은 1652년, 파리는 1672년에 문을 열었다. 런던에서 처음으로 차가 판매된 시기는 1657년인데, 캐서린 드 브라간사는 1662년에 이 중국 음료를 영국 궁정에 소개했다. 이 세 가지 음료는 처음에 유럽에서 신통한 약처럼 간주되었으며, 부유층만이 즐길 수 있었다. 희귀하다기보다는 세금이 워낙 많이 붙고 운송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값이 치솟은 것이다. 영국 정부가 차에 지나친 세금을 매긴 탓에 1773년에는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시기의 여성들은 차 하인을 별도로 두어 자신이 마실 차를 관리하게 했다.
---p.234 『제3장 식사 시간』 중에서
종교와 의학에서는 음식이 중요하게 다루어졌지만 회화에서는 그 지위가 사뭇 초라했다. 16세기 이래로 예술 이론가와 학자 들은 정물화, 그중에서도 특히 음식을 다룬 정물화를 예술적 위계의 맨 아래에 놓았다. 위대한 문학 작품이나 음악, 무용, 영화 음식을 찬미한 작품들이 얼마나 많은가? 간혹 그 진지한 주제를 희극과 해학극으로 다룬 작품도 있다. 「사랑과 죽음」(1975년작)이라는 영화에서 우디 앨런은 나폴레옹과 웰링턴 공작의 경쟁심을 ‘쇠고기 웰링턴’과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의 페이스트리를 동원하여 재치 있게 표현한다. 이 두 음식에는 ‘사랑’이나 ‘죽음’에서 느껴지는 장중함과 위엄이 없다. 앨런이 음식을 다루는 것처럼 역사를 조작한다면 역사는 유쾌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것이 된다. 음식을 예술의 주제로 삼을 때의 문제점은 바로 그 ‘낯익음’이다. 우리는 사업을 하거나, 연애를 하거나, 행사나 의식을 치를 때 식사가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음식은 모든 사람이 늘 접하는 극도로 평범하고 진부한 것이어서 특별한 고려의 대상이 될 만한 가치가 없어 보인다. ---p.25-26 『음식과 예술』
대다수 서양인들의 식단에 육류가 자주 등장하게 된 19세기 이전까지 육류는 부자들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기에 고기를 먹지 말라는 교회의 명령은 완전히 비현실적이고 수사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순절의 율법에 따르면 고기뿐 아니라 짐승에게서 나온 식품 전부가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달걀, 버터, 우유, 치즈, 베이컨, 돼지기름 등 빈민의 식단에 맛을 가미해 주던 식품도 모두 금지되었다. 우유를 먹지 못하면 포리지를 끓일 수 없고, 동물의 지방과 치즈를 쓰지 못하면 빵에 바를 게 없으니 음식 맛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그 대용물로 마련된 올리브유, 생선, 각종 야채도 훌륭한 음식이었다. 그러나 빈민들은 싱싱한 생선보다는 소금에 절인 생선을 먹으며 육류 섭취 금지 기간을 견뎠다. 따라서 빵과 생선이 그려진 17세기 회화 작품을 볼 때는, 그 작품이 육류를 먹지 말고 고통을 견디며 정화하라는 종교적 명령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p.49 『제1장 시장 풍경』
스펜서의 그림 속 남자는 바닥에 흩어진 식품보다 체면을 잃은 것 때문에 기분이 상해 있다. 화가는 남편이 화난 이유가 식품에 대한 절박함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당연시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미국적인 시장 풍경은 아르첸이나 렘브란트, 체루티의 작품과는 사뭇 다르다. 스펜서의 19세기 장바구니에는 사철 식품이 모두 들어 있다. 국제적인 규모의 장거리 쇼핑망이 발달한 덕분에 웬만한 식품은 모두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소금이나 설탕에 절이거나 말리는 방법 등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낯익은 식품 보존법 외에도 통조림이나 냉동 같은 새로운 방법이 이미 존재했다. 이런 식품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도 운송되었는데, 병이나 깡통에 넣어 신속하고도 대규모로 식품을 보존하는 19세기 방식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스펜서의 남편이 도시 길바닥에 떨어뜨린 달걀, 양상추, 오이 등은 현지에서 재배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1850년대의 시카고 같은 대도시는 철도를 비롯한 수송 수단을 통해 단시간에 어떤 식품이든 가져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30∼40년 뒤에는 현대적인 슈퍼마켓도 등장하게 된다.
---p.81-82 『제1장 시장 풍경』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로 모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던 귀스타브 쿠르베도 서민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예를 들어 사과를 그리더라도 그는 농부들이 실제로 접하는 투박하고 울퉁불퉁하며 흙이 묻은 사과를 그렸는데, 이는 같은 시기에 앙리 팡탱 라투르가 묘사한 중산층 식탁을 장식하는 사과와는 사뭇 다르다. 또한 앙리 팡탱 라투르는 계급을 연상시키는 부속물로 우아한 도자기 찻잔을 함께 그렸다. 이처럼 음식 그림에는 사회의식이 크게 작용한다. 사회의식은 특히 그림의 배경이나 식사 장면과 관련되지만 음식을 준비하는 그림에도 반영되어 있다. 노동 계급은 캐비아나 꿩을 먹지 않고, 모네가 그린 것과 같은 값싸고 질긴 국거리 고기를 먹는다. 그리고 부자와 힘 있는 사람들은 양배추와 양파가 주재료로 들어간 음식을 즐겨 먹지 않는다. 때로는 식기 하나로 사회적 지위를 나타낼 수도 있다. 1920년대의 자본주의를 통박한 디에고 리베라의 「월스트리트 연회」는 복장이나 돈 가방이 아니더라도 샴페인 잔만으로 등장인물들이 방탕하게 사는 부자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술잔 하나로도 특별한 계급과 특별한 생활방식을 표현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클로드 모네의 초라한 도기 잔과 앙리 팡탱 라투르의 찻잔 역시 특정한 사회적 지위를 대변한다.
---p.127-129 『제2장 식사 준비』
수프에서 시작해 생선, 육류, 샐러드, 디저트, 과일과 치즈, 커피와 브랜디로 이어지는 오늘날의 식사 코스는 19세기가 되어서야 통용된 것이다. 오직 러시아에서만 코스마다 한두 가지 요리가 있었고, 식사는 각 음식이 하나씩 나오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식사하는 사람마다 하인이 한 명씩 시중을 들었다. 따라서 19세기에 이런 식의 식사 방법은 러시아식이라고 불렸다. 수세기 동안 상류층의 일반적인 식사 양식은 여러 가지 음식을 한꺼번에 식탁 위에 늘어놓고 먹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프랑스식이라고 불렸다. 식사의 각 ‘코스’는 여러 가지 요리를 포함하는 프랑스식으로 구성되었으며, 주인이 손님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또한 고기를 썰어 나누어 주는 일도 하인이 아니라 집주인의 몫이었다. 19세기 이전의 서양 메뉴에서 식사의 각 코스에 나오는 음식은 무척 다양했다. 19세기 이전에 치러졌던 연회의 사례를 보면 많은 면에서 현대의 식사와 크게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p.194 『제3장 식사 시간』
커피, 차, 초콜릿은 17세기에 유럽에 전해졌다. 교황 클레멘스 8세는 1594년에 처음으로 초콜릿을 마셨지만, 세비녜 부인은 1671년에도 초콜릿을 마시는 것이 새로운 유행이라고 말했다.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이탈리아의 경우 1645년, 영국은 1652년, 파리는 1672년에 문을 열었다. 런던에서 처음으로 차가 판매된 시기는 1657년인데, 캐서린 드 브라간사는 1662년에 이 중국 음료를 영국 궁정에 소개했다. 이 세 가지 음료는 처음에 유럽에서 신통한 약처럼 간주되었으며, 부유층만이 즐길 수 있었다. 희귀하다기보다는 세금이 워낙 많이 붙고 운송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값이 치솟은 것이다. 영국 정부가 차에 지나친 세금을 매긴 탓에 1773년에는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시기의 여성들은 차 하인을 별도로 두어 자신이 마실 차를 관리하게 했다.
---p.234 『제3장 식사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