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은 말 그대로 공산주의의 원칙들을 명제의 형태로 단순하게 나열한다. 정치, 사회, 인간, 기술, 노동, 생산, 경제학, 무역, 도덕, 가족, 여성, 이데올로기, 계급, 전쟁, 평화, 정부, 민족 등의 수많은 주제들을 다룬다. 하지만 선언문이기에 이론적으로는 충분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또 『공산당 선언』에는 당대의 정세에 개입하기 위한 선동적, 정치적 선언의 측면과 역사학, 철학, 사회학, 경제학이 혼합된 이론적 저서의 측면이 공존한다. 그래서 해석과 수용도 다양하다. 또한 문체도 현란하다. 『공산당 선언』의 문체는 단순한 논쟁 제기가 아닌 반란 행위로서의 의미가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 p.25
자연 속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이 자연을 이용 수단으로만 보는 태도인 대상화는 관계의 한 면이다. 그리고 대상화도 맥락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이뤄진다. 인간과 다른 자연의 상호 관계는 긍정적 상호 관계일 수도 부정적 상호 관계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는 인간과 다른 인간, 인간과 다른 자연물의 상호 관계가 자본주의라는 조건 때문에 더 적대적으로 되었다고 보았다.
자연을 대규모로 파괴하는 인간의 활동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요구하는 이윤의 무한한 추구로 인해 발생했다. 인간이 존재해온 오랜 동안 자연에 영향을 미쳐 왔지만 생존 자체를 위해 자연을 이용한 정도는 자본주의 시기 이윤 추구 목적으로 행해진 정도에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라는 역사 발전의 특수한 단계에서의 인간 활동이 생태 위기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지 인간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 p.55
“노동의 불쾌함이 자라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임금은 하락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하나의 생산요소, 상품으로 전락한 결과, 경제성의 원칙에 따라 생산 비용을 줄여야 하는 자본가는 임금을 가능한 만큼 낮춘다. 가격이 하락한 노동은 더욱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분업의 확대, 노동시간의 연장, 노동강도의 강화가 발생한다. 자본주의 시장의 변동이 가져오는 위험도 노동자들에게 전가된다.
“자신을 조각내어 팔아야만 하는 이 노동자들은 모든 다른 판매품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상품이다. 그래서 (상품과) 똑같이 경쟁의 모든 오르내림, 시장의 모든 요동에 노출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는 시장의 변동에 휘둘리는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것이 된다. 불황이 닥치면 노동자들이 제일 먼저 해고된다.
--- p.66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양한 발전단계들을 거친다.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그들이 생겨나면서 시작한다.” 투쟁은 그들이 존재하자마자 시작된다. 계급투쟁은 의식적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의 본질 안에 있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자본가의 생존 방식은 착취이고, 노동자의 생존 방식은 착취당하는 노동에 있다.
‘투쟁’은 눈앞에 드러나는 폭력적인 저항 행위만이 아니다. 애초에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적 관계는 이해관계가 반드시 상충하는 적대적인 방식으로 맺어졌기 때문에 ‘투쟁’은 태어나자마자 시작된다. 즉 자본가의 착취가 계급투쟁의 시작이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착취당하는 패배의 방식으로 시작하지만 곧 착취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계급들 사이의 투쟁은 계급사회의 기본적인 상황이다.
--- p.75
마르크스는 앞서 부르주아계급의 발전을 얘기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 이 말은 마르크스주의 정치사상의 핵심적인 명제가 된다.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을 정치투쟁이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계급투쟁이라는 사회구조적 현상은 정치권력의 장악과 행사를 중요한 수단으로 삼는다. 부르주아독재의 수단인 국가를 장악해 활용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계급투쟁에서 중요한 과정이 된다.
그러나 계급투쟁을 정치투쟁으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 사회구조의 혁명적 변화가 근본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마르크스주의의 흐름 안에서도 정치투쟁과 사회변혁투쟁 가운데 어느 것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두 노선이 존재했다.
--- p.79
대중이 자립적, 자발적인 주체가 된다는 말의 의미를 여러 측면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는 혁명 주체로서 공산주의자들의 자세를 말했지 특정한 집단이나 제도를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또 공산주의자들은 “이론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의 조건들, 진행 과정, 전반적인 결과들에 대한 통찰에 있어서 다른 프롤레타리아트 대중들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말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지 공산주의자나 당이면 저절로 그런 통찰력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실천적, 이론적 자격을 갖추지 못한 정치집단은 공산주의자일 수가 없다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맥락에 부합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질문은 대중 스스로가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은 언제 어떻게 실현되는가 그리고 그때까지의 과도기에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은 무엇인가다.
--- p.109
권력 장악 이후의 과제는 사적 소유의 폐지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계급투쟁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라는 소유관계가 근본적인 원인이 되어 일어난 일이다. 인류의 역사는 소유관계들이 지속적으로 교체되어온 역사다. 역사적 시기마다 다른 소유관계들이 생기고 없어졌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라는 자본주의만의 고유한 소유관계가 존재한다.
근대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는 생산물을 생산하고 전유하는 체계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 체계는 계급 적대와 착취의 체계다. 그리고 공산주의는 부르주아지의 착취의 근거를 폐지하는 운동이다.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의 폐지가 공산주의의 과제가 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이 부르주아지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의 목표는 “소유 일반의 폐지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다.” 공산주의는 한마디로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 폐지의 노선이다.
--- p.117
마르크스 당시의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비판적으로 소개하는 『공산당 선언』의 3, 4장은 1, 2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여기서 소개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들은 이제는 과거의 낡은 이야기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1848년에 대결했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들 가운데 여럿은 마르크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오늘날까지도 계승되고 있다. 그 이름과 원형은 사라졌어도 중요한 아이디어와 개념, 관점이 다른 사상들에 영향을 줘 계승되는 경우도 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 어떤 다른 사회주의 노선들 사이의 차이는 20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도 여전히 기본 골격을 유지하며 계승되어왔다. 현대 사회의 중요한 정치 노선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 그 사상들의 역사를 아는 것은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공산당 선언』에서의 다른 사회주의에 대한 소개와 비판이 실제로 그 사회주의를 정확하게 소개, 비판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3장은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다른 반자본주의 운동과 자신들 입장의 차이를 통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입장을 선명하게 이해하는 자료로서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3장은 혁명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정치적 투쟁의 결정적 의미, 자본주의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공산주의 실현의 역사적 조건 등이 마르크스의 고유한 주장임을 분명히 밝힌다. 마르크스 자신도 그런 의도에서 나중에 3장만 따로 떼어 다른 매체에 게재하기도 했다.
--- p.181
반동적 역사관은 과거의 어떤 사회를 이상적으로 보고 자본주의 이전 상태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그 상태는 실제의 과거일 수도 있고 허구의 과거일 수도 있지만 대체로 과거를 미화한 경우가 많다. 반동적 사회주의자들은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가 대규모 산업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에 현대 사회의 모든 병폐들이 나타났고 따라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그 문제들도 해결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과거 사회에 현대의 문제들은 물론 그 시대만의 문제들도 없었다는 생각은 조작된 기억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과거에 대한 향수보다 부르주아사회가 보여주는 과거 사회를 파괴하는 혁명적 변화의 힘에 더 큰 인상을 받은 근대의 아들들이었다. 애초에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지만 근대의 성과들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반동적 사회주의를 다시 “봉건적 사회주의”,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 “진정한 사회주의”로 나눈다.
--- p.186
덜 체계적이고 더 실천적인 보수적 사회주의 역시 부르주아사회가 적절하게 개량되기만 한다면 노동자계급의 이해에도 부합할 것이라고 본다. 보수적 사회주의는 혁명운동을 통해 정치적 변화를 가져오기보다 생활환경에 물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게 더 낫다고 주장한다.
이 사회주의는 “물질적 생활 관계들의 변화를, 혁명적 방법으로만 가능한 부르주아 생산관계의 폐지로는 결코 이해하지 않는다. 대신 이 생산관계에 기반해서 진행되며 또 자본과 임금노동의 관계는 결코 변화시키지 않으며, 기껏해야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값싸게 만들고 국가운영을 간단하게 만들어주는 행정적 개선으로만 이해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관점에서 보면 보수적 사회주의의 근본적 한계는 자본주의사회의 토대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사회의 부수적 현상들만 개선하려는 태도다.
--- p.199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의 3, 4장도 시효가 지났다고 본다. 그들은 1872년 독일어판의 서문에서 “역사 발전이 거기에 열거된 당들의 대부분을 세상에서 소멸시켰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은 섣부른 것이었다. 1872년에 소멸한 것처럼 보였던, 그 두 사람이 열정적으로 논박했던 노선과 사상들이 그들의 사망 직후에 다양한 정치적 운동과 사상가들의 몸을 빌려 부활했다.
21세기인 오늘날에도 19세기에 만들어진 사회사상의 계승자들 간의 경쟁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마르크스가 애써 쫓아낸 비마르크스주의 사회사상들은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운동과 경쟁하거나 노동운동을 좌파의 이름으로 위협하고 있다. 21세기인 지금, 『공산당 선언』이 “역사적 문서”에 그치지 않고 현재적 의미를 가지는 것은 자본주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게다가 반자본주의를 표방하지만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운동을 몰아내려 하는 사상과 운동들에 포위된 노동자계급의 상황 때문이다.
--- p.210
『공산당 선언』을 읽으면서 생각해볼 문제 중 하나는 『공산당 선언』 당시의 마르크스의 입장이 이후로도 지속되는가, 변화가 있다면 어떤 점에서 변화했느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72년 독일어판 서문에서 1848년 저술, 출판의 과정과 그 이후 여러 번역본 발간 과정을 설명한다. “개진되어 있는 일반적 원칙들은 크게 보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완전히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한다. 물론 “몇몇 군데는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원칙들의 실천적 적용은 언제 어디서나 당대의 역사적 상황들에 의존하게 될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래서 2장 끝에서 제시된 과제들은 큰 의미가 없고 수정될 것이라 본다. 불행하게도 1848년 당시의 시급한 당면 과제들 중 상당수는 장기 과제가 되어버렸고, 이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다.
--- p.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