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길이란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어요. 굳이 하나를 얘기하자면, 큰 ‘결핍’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문학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굉장히 멀리 있다는 거예요. 문학을 시작하더라도 끊임없는 결핍과 실패와 좌절과 무시, 열패감. 그 속에 있어야 하고 그걸 계속 겪어야 해요. 적당한 정도로나마 마이너리티적인 성향이나 또 고생스러운 것을 몸으로 또 정신적으로 겪었으면 합니다. 거기에 재능이 있고, 노력까지 한다면 당연히 어떤 결과물이 나오겠죠. 분출하듯이.
시를 처음 쓰는 사람은 자기가 써내려간 것이 시적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그것이 시로 가려면 얼마나 그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아는 것. 이렇게 다급한 세상에 시란 다분히 정신적인 거예요.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것을 몇 단계 넘어서 겨우 도달하는 정신적이면서 미학적인 거예요. 우리가 ‘시’라고 부르는 모든 것 안에 그런 미세한 차이이면서 동시에 엄청난 차이가 존재해요. 그 길로 가는 과정은 즐겁지만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희열이 함께하는 길이죠.
우린 누구나 ‘혼자 있는 시간과의 싸움’에서 뭔가를 하면서 살고 있는데 질문은 그냥 단순하기만 한 거예요. ‘쉬는 날엔 뭐하느냐’고 물어오면 하나 둘을 대답할 테고, 그렇다면 ‘쉬는 날엔 매번 그 똑같은 일을 해야 하니?’ 싶은 거죠. 질문은 결국 그 사람이 누군지를 말해주는 것 같아요. 스마트폰 영향인지는 몰라도 요즘 사람들은 도무지 사람을 만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요. 만나지 않기 때문에 만날 줄을 모릅니다. 만나지 않기 때문에 만나더라도 얼마 안 가 헤어지고 맙니다.
우리 모두 병에 걸려 있잖아요. 외로움이라는 병. 하지만 젊은 사람한테 외로움은 약이 될 거예요. 외로움이란 스스로 ‘자존(自存)’하기 위한 방식에서 생겨나는 거니까. 특권이라 여겨도 참 괜찮겠다 싶지만, 지금의 청춘은 자기를 필요 이상으로 아끼고 과하게 사랑해요. 자기를 사랑하는 것, 중요하죠. 사람이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부분이지만, 자기를 너무도 사랑해서 외로운 쪽으로 기우는 건 쫌. 혼자 있는 시간을 얼마나 갖느냐가 결국 그 사람을 빛나게 합니다. ‘외로움의 세포’를 잘 다스리면 괜찮은 사람, 나은 사람이 돼요. 이건 명백히 확실해요.
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아주 간단해요. 이 세상에 음악이 필요해요. 이 세상에 예술이 필요해요. 정신없이 사느라 내가 사람인지를 모르고 사는 일련의 문제들과 충돌을 겪어요. 하루 세끼 온전하게 밥을 먹고 사랑하는 사람하고 살더라도 그 사이, 그 간극에는 시가 놓여야 하고, 음악이 흘러야 하고, 그림이 걸려 있어야 하거든요. ‘와락’ 하는 것들이요. 그것들 없이도 살 수 있을까? 하고 한 번쯤 의문을 던질 수 있지만, 실제로 그것이 없다면 몸이 불편하고 삶이 두려워질 거라고 믿는 사람이에요. 시가, 음악이, 미술이 우리를 동정하고 있다고도 보고요, 우리의 약한 부분을 메꿔준다고도 믿어요. 그래서 시를 쓸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일을 잘하려면 그 사람을 사랑하면 돼요. 일이니까 어려울 수밖에 없거든요. 같이 일하는 사람을 내가 먼저 사랑하면 그 일에서 승리하게 돼요. 이건 진실입니다.
그전에 친구들하고 술도 자주 마셨어요. 물론 일 때문에도 마셨고요. 일주일에 6~7일을, 3~4년간 쭉. 그런데 ‘그날’ 이후 술을 덜 마시게 됐어요. 그날, 세월호……. 독일 뮌스터 허수경 선배 집에 머물고 있는데 세월호 소식을 듣게 되었거든요. 허수경 선배 독일인 남편분이 영어로 들려주는데……. 그날 이후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반가운 자린데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더라구요. 그 무렵부터 술을 덜 마시게 됐어요. 공적인 일, 다른 사람하고 약속을 지켜야 하는 일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것들, 내가 좋아해서 손을 뻗는 관계는 줄이자고 다짐 같은 걸 했어요. 보고 싶다고 다 만나지 말자, 이병률 너도 정신 좀 차리자……. 한 멍청한 개인한테도 그 일은 어떤 분명한 선을 긋게 하네요. 세월호의 장막 같은 겹 하나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도 살고 있는 것 같지가 않은데. 난 이 나라의 이 지경을 살고 있는 게 아직도 이상해요.
여행을 갈 때 꼭 가져가야 할 것을 많은 분들이 자주 묻는데, 나라면 좋은 기억 장치를 가져가겠어요. 좋은 기억 장치라는 게 기술적인 뭔가가 아니라, 무엇보다 ‘비운’ 상태여야죠. 텅 빈 상태라 잘 들어앉거든요. 외로움이나 결핍이 있는 상태처럼, 많이 비운 상태로 가는 것. 많이 소진된 상태로 가는 거요. 그래야 잘 흡수할 수 있어요. 그럴 때일수록 웬만한 것들이 아름답고, 소소한 것들이 고맙죠.
시대에 맞서는 시인이기보다는 ‘사람’에 맞서는 시인이에요. 하늘이 시인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했다면 그건 과연 무엇일까요. 그 답은 시인한테 있겠는데, 아니, 답이라기보다는 시인의 시와 시인의 삶 속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인데. 시인으로서 저의 역할은 다음 세대를 아름답게 물들이는 일입니다. 다음 세대가 세상에 대고 욕심을 휘두르거나 얕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지 않게 하겠습니다.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이어야겠지요.
사랑을 잊기에 그만인 곳이 있습니다. 알려드릴게요. 핀란드, 겨울의 국도예요. 눈이 덮여 있어서 길이 분간이 안 되는 길 양옆으로 침엽수들이 눈을 뒤집어쓰고 있어요. 핀란드 설국의 풍경은 오로지 그것뿐입니다. 차 안에서 시간이 지루하면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을 보면 되는데 그것도 곧 지루해지죠. 그 풍경 앞에서 문득 말이죠. 이상하도록 내가 살았던 방식은, 내가 좋아한 사람에 대한 감정은 복잡한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는 거죠. 지루한 것으로부터 우린 명료한 것을 찾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이 지루하다던가, 이만큼의 행복이 지루하다던가, 더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지점에서 뭔가 명료해지는 것처럼요. 이상하게 인생은 숨통을 따라서 그렇게 돼가는 거죠.
사랑하면 자야 하잖아요. 손 잡고 자는 거 말구요. 잠도 감정의 한 영역이니까. 하지만 그러면서 확 가까워지는 느낌, 뭐든 괜찮을 것 같은 느낌. 난 그게 싫더라구요. 서로에게 쉬워지는 느낌이죠. 동물적인 상황을 겪고 나면 원래 다 그럴까요.
우리가 한 사람과 헤어지고 잊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죠. 하지만 결국 잊어야 해요. 내가 살아야 하니까. 그게 진실이에요. 어떻게든 잘 털어내야만 하는 것. 그래서 잊고, 잊히는 거예요. 결국 사랑이 아닌 삶을 선택하기 때문에 헤어질 수 있고, 잊을 수 있는 거겠지만. 그런데 우리의 몸이 불쑥불쑥 기억하는 건 그게 아닌가 봐요.
난 공부 잘하는 사람하고 일하고 싶지가 않아요. 재능이나 열정이나, 아니면 최소한의 가능성을 가진 사람하고 일하는 게 신나요. 공부는 중요하지만, 그 공부가 직업을 구하는 일에만 쓰이는 건 절망이죠. 사람을 만들어주는 게 공부라서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 공부 많이 한 사람이,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은 걸 많이 보죠. 말씀처럼 공부가 신앙이 되어서 그렇죠. 교육열은 들끓지만, 수준은 영 그만큼이 안 돼요. 책을 펴놓고만 하는 공부가 전부가 아닌 세상이 되었다는 신호라고 여겨요.
오죽하면 나 스스로에게 붙이고 싶은 별명이 ‘Fragile Tag’일까요. 공항에서 짐에 부치는 ‘취급주의’ 꼬리표 있잖아요.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