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젊은이의 이름은 중근이고 성은 순흥(順興)을 본관으로 하는 안(安)씨였다. 이름이 중근인 것은 젖먹이 때부터 주변의 자극에 너무 예민하고 반응이 빠른 그의 성격을 가볍다고 여긴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이 집안의 항렬자인 근(根)에다 무거울 중(重) 자를 얹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는 그의 몸에 북두칠성을 닮은 일곱 개의 점이 있다 하여 응칠(應七)이란 이름으로 그 상서로움을 기렸고, 아버지 안태훈은 따로 아들에게 자임(子任)이란 아명(兒名)을 지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어릴 적에 가장 많이 불린 이름은 응칠이었고, 관례와 혼례를 치른 뒤에는 관명인 중근이 더 널리 쓰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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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중근은 어렴풋하게나마 그런 아버지의 내면에서 피 흘리고 있는 의식들을 느낄 수 있었다. 무력감으로 상처받은 자부심이 그랬고, 낡은 구조와 급변하는 시대에 끼어 있는 가문과 자신을 지켜 내야 하는 신흥 호족으로서의 번민이 그랬다. 취하지 않은 밤은 그것들로 하얗게 지새기 마련인 모색과 궁구(窮究) 같은 것도 분명 피 흘리는 의식의 일부였다.
--- p.161
그 무렵은 조선의 치안 상태가 좋지 않고, 호랑이 같은 맹수가 흔해 선교사들은 대개 총기를 지니고 다녔다. 빌렘 신부도 그 권총을 호신용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오지를 여행할 때나 해가 지면 몸에 지니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던 듯했다. 빌렘이 탄창을 꺼내 장전 상태를 확인한 뒤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갑자기 교당 입구가 시끌벅적했다.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끌고 오는 모양인데, 끌려오는 사람이 구원을 청하듯 악을 쓰며 대들고 있었다.
--- p.242
청계동과 안태훈 일가가 천주교의 열기로 달아올라 있는 동안 조선왕조도 변화의 파고 위에 높이 올라앉아 있었다. 그해 봄 러시아 공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조선의 대군주는 그 여름의 준비 끝에 대한제국을 탄생시켰다. 원구단(圓丘壇)에서 화려한 즉위식을 올리고 스스로 황제라 일컫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쓰니 곧 광무 황제요, 대한제국이다.
--- p.273~274
중근이 빌렘 신부의 복사로서 황해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전교에 열중한 동안도 세상은 숨 가쁜 변화를 거듭하였다. 그중에도 그 무렵의 조선 사회를 뿌리부터 뒤흔든 것은 독립협회의 활동이었는데, 창립 2주년이 지난 그때는 대한제국의 황제조차도 함부로 억누를 수 없을 만큼 큰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예를 들면, 그해 10월에는 독립협회의 항의로 법부대신 신기선이 해임되었고, 뒤이어 그 요구에 따라 내각이 개편되었으며, 다시 황실의 주요 재원(財源)인 무명잡세(無名雜稅)를 폐지함과 아울러 내정 개혁까지 약속해야 했다.
--- p.301
그렇게 몇 달을 보내는 사이 제국주의 일본의 정체는 더욱 뚜렷해지고, 거기에 맞서 싸우고 있는 조선 민중의 두 갈래 움직임도 선연하게 잡혀 왔다. 얼마 전 협동회(協同會)로 이름을 바꾸고 해체되어 사라진 보안회(保安會, 輔安會)의 애국계몽 활동과 홍천 등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무장투쟁이 그러했다. 거기서 중근은 자신이 그때껏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 p.367
이토 히로부미의 한문식 표기 이등박문(伊藤博文) 넉 자가 중근의 머릿속에 특별한 의미로 각인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런 을사늑약 체결 과정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이등박문은 그 전해에도 메이지 천황의 특사로 조선에 온 적이 있으나, 그때는 감사 사절로 온 데다 중근이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라 별반 주의를 끌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중근이 서울로 옮겨 앉아 유심히 시국을 살피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중근이 읽고 있던 신문들도 조약 체결의 과정을 상세하게 보도하여 이등박문의 위세와 역할을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그해 말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등박문이 초대 통감으로 오게 됨으로써 그 이름은 국권 침탈의 원흉(元兇)으로 더 깊이 각인되었다.
--- p.383~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