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의 불꽃놀이가 끝난 지도 오래. 그러나 아직 만화 해변의 아이들은 질리지도 않는 시신 파티를 계속하고 있다. 여름 한철 괴팍스러운 호러의 인기가 아니다. '소년탐정 김전일', '지뢰진', '키리코', '다중인격탐정 사이코'. 세기말의 범죄물 속에서 이미 개개의 죽음은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피해자들의 시신은 광적인 살인마들이 만들어내는 엽기적인 예술품일 뿐이다. 자신의 살인기술을 과시하기 위해 포카리 스웨트 음료에 담긴 시신을 소포로 보내고 추리퍼즐을 만들기 위해 시신을 조각낸다. 그뿐인가? '드래곤헤드', '베르세르크', '무한의 주인'의 광폭한 살해의 파노라마는 저 멀리 철학과 종교의 영역이지 내 육신에 부딪는 현실의 문제는 아니다. 죽음이 일상적인 시대, 그래서 죽은 자들의 영혼과 교류하는 '유유백서', '죽음과 소녀와 나'의 주인공들은 이미 낯선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라. 평범한 개인의 삶에서 죽음이란 얼마나 큰 것인지? 한 인간이 일생을 되돌아 정말로 죽어가는 사람을 보게 되는 것이 몇 번이나 되는지? 당연히 만화 속에서도 그 한순간의 죽음을 극적으로 그리는 명작들이 있었다. 조금은 과거의 것들, 그러나 진짜 죽음 하나하나가 의미 있었던 시절의 작품들이다.
"이런저런 패거리들처럼 빠지직 소릴 내가며 불완전 연소하는 게 아냐. 비록 잠깐이지만 눈부시도록 새빨갛게 타오르는 거다. 그리고 나중엔 새하얀 재만 남게 되지. 찌꺼기 따위가 아닌, 새하얀 재만이." 그렇게 마지막 싸움 끝에 링 한쪽 구석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앉아 있는 '허리케인 조'. 이것은 만화 사상 가장 유명한 죽음의 장면이자 가장 아름다운 라스트 신으로 손꼽힌다. 모든 것을 바치고 난 후에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 젊은 영웅. 그것은 1970년대의 일본이 만들어낸 영웅의 모델이었다.
--- pp. 138~139
만화는 자극적이다. 부정하려고 해도 결코 쉽지 않다.순수의 결정과도 같은 캐릭터, 그 변모하지 않는 성격들이 부딪히며 갖가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언제나 유치하기 짝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중에서도 순수의 여인이 사악한 유혹을 물리치고 환상의 왕자를 만난다는 로맨스 공식은 가장 비난받는 테마 중의 하나이다. 뻔하디 뻔한 삼각관계, 언제나 예측 가능한 결말. 그런데 그 유치한 공식을 가져간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는 왜 그리 재미없는가? 시끌벅적한 표절 시비를 불러 일으키며 창의적인 모방을 했다고 주장하는 작품들을 봐도 나는 베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하겠다. 그들은 만화가 주는 재미의 한부분도 베껴가지 못했다.
두근두근 운명의 추는 어디로 기울 것인가? 두 남자를 사이에 둔 소녀의 설렘은 60대의 할머니에게도 무의식의 피로 남아 있다. 만화가 재미있는 것은 그것이 본능에 닿아 있어서인지 모른다. 소위 말하는 순정만화에서는 정통의 삼각관계를 찾아보기가 결코 쉽지 않다. 삼각의 연애공식은 사실 너무나 기본적인 형태여서 오늘날의 세련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엔 너무 밋밋하기 때문이다. 10년 20년을 거슬러 올라가도 쉽게 눈에 뜨이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1970~80년대 스포츠만화에서 그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
국내 남성만화가들은 기묘한 습관을 공유하고 있는데, 그것은 작품이 바뀌더라도 주인공의 캐릭터와 이름은 거의 그대로 유지된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 성격마저도 미리 찍어놓은 듯 정확하고 명료하고 변함없다. 이상무의 탁이-숙이-준이 공식과 이현세의 까치-엄지-동탁 공식은 그 대표적인 경우다. 운명의 덫에 걸린 두 남자가 대결을 벌인다. 스포츠의 승리와 연애의 승리, 두 승부의 꼭짓점에 여자가 있다. 물론 이 삼각형 역시 작품에 따라 변형을 보이기도 한다. 이상무의 <아홉 개의 빨간 모자> 에서는 조연급인 봉구가 숙이의 사랑을 받는 홈런 타자로 등장하며 색다른 삼각형을 만들게 된다.
1970년대 일본 소녀 만화와 그 영향을 받은 1980년대 한국 여성만화에서 이미 삼각관계는 다종다양한 형태로 변형증식되어 있다. <캔디 캔디>만을 보더라도 안소니-캔디-테리우스, 캔디-테리우스-스잔나, 테리우스-캔디-알버트 아저씨 등 각양각색의 삼각형들이 겹쳐 있다. 대하 역사 로맨스로 가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진다.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유의 장미>는 운명으로 얽힌 세 남녀, 앙트와네트-페르젠-오스칼이 함께 태어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며 길고 긴 삼각형을 예고한다. 그러나 오스칼의 카리스마가 작품을 지배하고 페르젠의 이미지가 흐려지면서 이 삼각형은 잘개 쪼개지고 만다. <오르페우스의 창>에서도 주인공 유리우스가 첫사랑인 크라우스와 그녀를 흠모하는 이자크와 형성하는 삼각 방정식이 중요한 축을 이루지만 변방의 관계들이 너무나 복잡해 그 아슬아슬한 전율이 떨어진다.
--- pp. 104~105
나와 만화 친구들은 한 작품을 보면 그냥 가만히 있지 않는다. 만화가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읽어주는 것만으론 절대 만족하지 못한다. 누군가 창의적인 문학의 독자가 되기 위해서는 작가의 의도를 넘어선 무언가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하지만, 만화에서 그것은 너무도 상습적이고 당연한 일이다. 우리들은 이 만화와 저 만화를 비교해보고 전혀 엉뚱한 의미를 만들어낸다.
<배가본드>의 미야모토 무사시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만화 속에서 주인공의 캐릭터만 분리해내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본다. <아기 공룡 둘리>의 주인공들로 로맨스물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만화가조차 미처 자기 만화 속에 들어 있는지 알지 못했던 것을 낼름 훔쳐먹는다. 통계상 소년만화에서는 몇 컷마다 한번씩 코피 흘리는 눈요기거리가 나와야 한다. 모모 만화는 이 규칙을 가장 잘 지키고 있다. 다음 페이지에는 분명히 나온다. 자기 마음대로의 미학적 기준을 만들어 만화를 평한다. 나는 주인공의 헤어스타일이 다섯 가지 이하인 순정만화는 안 본다. 만화 독자들은 만화의 산에 올라가 만화가가 있는지도 몰랐던 보물창고를 찾아 기어코 훔쳐버리고 만다. 정말로 휘황찬란한 박물관에 들어가서도 그 밑에 숨겨져 있는 색다른 재미들을 도굴해내는 솜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 머리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