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기에게 일어날 일은 모두 일어났다고 느꼈다. 앞으로 일어날 수 있거나, 일어났어야 하는 일까지도. 마치 일시적으로 죽음을 경험한 사람처럼, 결정적으로 인생을 끝까지 산 사람처럼,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하여 소박한 상을 받고, 자신이 베푼 덕행의 대가로는 오히려 심한 벌을 받았다고 느꼈다. 또한 오래전부터 계속해서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등장인물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 p.17
이렇게 해서 나는 적어도 그 순간에 내게 암시된 것들을 충실하게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썼다. 그리고 모두 찢어 버렸다. 다시 쓰고, 다시 모두 찢어 버렸다. 이렇게 하는 동안에 몇 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나는 쓰고 또 썼다. 마침내 내가 쓸 수 있는 소설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썼다. 소설을 썼다. --- p.34
더구나 이 직업적인 인도주의자들은 아우슈비츠가 우연히 그 당시 거기에 있었던 사람에게만 일어났다고, 하지만 그때 그 자리에 우연히 있었지만 아무 일도 겪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믿고 싶어 했다. 다시 말해 이 편집자는 내 소설에서 그와는 반대의 것을,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읽고 싶어 했다. 우연히 그때 그곳에 있던 내게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지만, 아우슈비츠는 나를 전혀 더럽히지 않았다고. 그러나 나는 이미 더럽혀져 있었다. 그리로 끌려간 다른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르게, 나는 더럽혀져 있었다. --- p.52
우리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항상 무언가를 선택한다. --- p.55
아우슈비츠는 소화되지 못한 고기 완자처럼 내 안에, 내 위장 속에 있었다. 정말 예기치 않은 순간에 그 양념들이 내 안에서 솟아올랐다. 쓸쓸한 지역을 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황량한 공장 지대나 해가 쏟아지는 길, 집의 뼈대로 세워 놓은 시멘트 기둥, 동물의 냄새나 타르와 나무판자의 역한 냄새를 한번 맡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과거의 한 부분과 전체와 분위기가 새로 또 새로이, 실재하는 현실의 힘을 지니고 내 안에서 솟아올랐다. --- p.97
그렇다. 비록 상상 속에서 예술적 수단을 사용하여 표현하지만, 그것은 힘을 지닌 현실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영원한 나의 객관성을 주어로 변화시키고, 이름을 불리는 대신 이름을 불러 주는 존재로 변화시켰다. 내 소설은 바로 세상에 대한 대답이었다. --- p.123
우리가 알고 있듯, 신이 죽었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에게 이 대답을 보내야 하는가? 나는 무(無)에게, 알지 못하는 어떤 이웃 사람에게, 세상에게 보냈다. 거기에서 생겨난 것은 기도가 아니라 소설이었다. --- p.123
쾨베시는 반짝거리자마자, 어느새 자기 앞에서 꺼져 버린 이 가능성이 정말 매력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기회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걸 어디서 밝혀내겠는가? 여기에 답을 줄 수 있는 건 오직 경험뿐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가능성이 아니라 삶이었다. 바로 그의 삶. --- p.218
쾨베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무엇에 대하여 글을 쓰는지, 그 글이 목적에 맞는 것인지 아닌지도 결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글을 이해할 수 없었고, 어떤 목적을 위해 썼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 p.360
“필연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질문이 또 잘못됐군요.” (…)
“필연적이지 않은 게 무엇인지 물었어야죠.”
“그럼…….” 수수께끼 같은 질문이 던져지자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한 사람처럼, 쾨베시가 베르그에게 순응하여 물었다.
“필연적이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사는 것.” 베르그가 입 주위에 장난스럽고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p.391
나의 고백은 그들의 고백보다 열등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나의 인생길을 걸은 사람은 여러분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 p.409
나의 의무는 한편으로 자각을 통해 인간의 무자비함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분이 값싼 정신의 안정을 찾기 위해 악의적인 책략을 써서 승리하는 것을 참지 않는 것, 그리하여 나의 존엄성을 지켜 내는 것입니다.
--- p.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