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학계에서 우스갯거리로 취급될 것이 분명한 주장들이 국내에서 열광적으로 갈채를 받는 현실이 분명 정상은 아니다. ‘민족주의’라는 한마디로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엄격한 논리가 요구된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학은 인문학임과 동시에 과학이다.
--- p.12, 「들어가는 말 | 이제는 역사를 새롭게 바라봐야 할 때」 중에서
실례로 고양시 행주산성은 오랫동안 통일신라 때에 쌓은 것이라 알려져 왔으나 발굴조사 결과 그보다 오래전인 7세기 삼국시대로 그 축조 시기가 수정되었다. 유물과 축조기법을 통해 확인한 것이다. 덕분에 행주산성을 통일신라의 산물이라 주장한 논문은 전부 무용하게 되었다. 이처럼 급변하는 게 고대사이다 보니, 수십 년 전 진실이라 여겼던 역사적 사실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이의 말은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통설은 계속 무너지고 있다.
--- p.21-22, 「1부 | 유물과 유적, 삼국시대의 타임캡슐을 열다」 중에서
인골의 체계적인 수습, 정리에서부터 사망 원인이나 생시에 앓던 질병, 습관, 영양 상태 등을 밝히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협업이 필요하다. 발굴조사 기술이 향상되고 체질인류학이나 법의학 등 유관 분야 전문가들과의 융복합적인 협동 연구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으니 과거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영역과 깊이로 연구의 범위가 확장될 것이라 믿는다.
--- p.79-80, 「2부 | 무덤과 인골, 고대인이 말을 걸다」 중에서
이후 신라 지증왕이 502년에 순장을 폐지하면서 후장의 풍습도 사라져갔다. 경쟁적으로 대형 무덤을 축조하던 신라의 사회적 분위기는 6세기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순장과 후장을 폐지하고 현실 세계의 삶의 무게를 두면서 산성을 축조하고 군사력을 키운 것이다. 반면 가야는 여전히 종전의 장례 풍습을 버리지 못했다. 어찌 보면 가야는 망하고 신라는 흥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 p.121-122, 「2부 | 무덤과 인골, 고대인이 말을 걸다」 중에서
청동기시대부터는 신석기시대까지 이어져 오던 평등한 사회가 깨지며,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으로 나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가진 집단과 못 가진 집단 간의 대립, 사회적 갈등, 긴장된 분위기 등이 청동기시대를 대변하는 이미지인 것이다. 이때부터 등장한 환호취락은 지속해서 발전한다. 방어적인 측면을 강조한 취락은 산 위로 올라가고, 많은 주민이 사는 취락은 나지막한 구릉 위에 마련된다. 환호는 방어기능 외에도 마을 안팎을 나누는 역할을 했는데, 이 때문에 수도 안에 사는 중앙인과 바깥에 사는 지방인을 구분 짓는 차별의 시발점이 됐다. 이렇게 발전한 취락을 중심취락 혹은 거점취락이라고 부른다.
--- p.146, 「3부 | 수도유적, 삼국의 심장이 깨어나다」 중에서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우리보다 일찍부터 외부 세계에 깨어 있었다. 고대로부터 인도와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중세에는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영국의 문화와 접촉했기에 지금은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문화 사회로 접어든 우리들은 이 나라들로부터 배울 것이 무엇인지 찬찬히 살펴봐야 한다.
--- p.234, 「4부 | 교류의 길, 글로벌 삼국시대를 열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