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내 머리 속에는 오직 완성된 포니 모습만이 아른거렸다. 눈을 감으면 '자랑스런 우리의 조랑말' 포니가 한국의 거리를, 나아가 세계의 도로를 누비는 모습이 또렷이 그려지곤 했다. 그런 가운데 나는 야심만만한 계획 하나를 세웠다.
마침 우리 포니가 제작되고 있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1974년 10월 30일부터 '제55회 국제자동차박람회' 즉 국제모터쇼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모터쇼란 세계 각국의 유명 메이커들이 현재 생산하고 있거나 다음에 생산할 새 모델을 출품시켜 신차의 기능과 스타일을 비교하고, 시판 후에 있을 반응을 미리 예상해 보는 자리였다. 따라서 미국의 GM과 포드는 물론이고 각국을 대표하고 있는 자동차 메이커들, 즉 폴크스바겐, 벤츠, 푸조, 도요다, 피아트 등이 매년 자리를 함께 했으며, 소련의 라다와 모스크비치 등 모든 자동차 메이커가 참가했다. 당시 유럽지역에서는 제네바, 프랑크푸르트, 파리, 런덩 등 각 지역에서 다양한 모터쇼가 매년 몇 차례씩 개최되고 있었다.
'토리노 모터쇼에 포니를 보내자!'
포니의 제작현장을 지켜보며 기대와 흥분에 가득 찼던 나는 결심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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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섹을 처음 수출한 1986년, 우리는 LA에서 열린 모터쇼에 처음으로 엑셀을 출품하여 많은 미국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때 인상적이었던 광경은 오래 전에 미국에 이민 온 한국 할머니 한 분이 모터쇼에 전시 중인 엑셀을 자랑스럽게 쓰다듬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에서 어떻게 이런 좋은 차를 만들어 미국까지 수출하게 되었느냐...'
마치 손자를 어루만지듯 엑셀을 쓰다듬던 할머니의 눈에 흐르던 눈물의 의미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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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신년(新年) 차례를 지낸 뒤 세배하는 자리에서도 큰형님은 아우들과 사업얘기, 세상 돌아가는 얘기만 하실 뿐 그룹 회장 얘기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그룹 회장을 맡는 문제는 그것으로 일단락 된줄 알았다.
그런데 시무식(始務式)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호출이었다. 글 자리에서 큰 형님은 비로소 자신의 구상을 설명하며 동의를 구했다.
"애들을 회장 시켜야겠어. 그러자면 네가 자동차 회장이랑 그룹 회장을 맡아야 모양이 서지 않겠어?"
큰형님이 말하는 '애들'이란 큰형님의 아들들, 그러니까 내 조카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조카들이 회장이 되는데 내가 그대로 사장으로 남아 있으면 삼촌이 조카들보다 아래 직책에 있는 결과가 되어서 모양새가 우스워진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제야 형님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큰형님의 뜻이 정히 그렇다면 나로서도 환갑이다 뭐다 나이 핑계만 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요.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그룹을 이끌어온 회장이기 이전에 어버이와도 같은 사랑을 베풀고 싶다는 형님의 속뜻을 이해 못할 내가 아니었다. 더욱이 1982년 4월에 교통사고로 장남 몽필(夢弼)을 잃은 큰형님으로서는 장남을 회장자리에 앉혀 보지도 못하고 먼저 보낸 아픔이 두고두고 가슴에 맺혀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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