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일만 해오신 어머니 손은 험한 일 한 적 없는 내 손보다 더 크고 단단하다. 손가락 마디는 사내들 손처럼 굵고, 손가락들은 이리저리 굽고 휘어 있다.
살갗은 거칠고 질기기만 하다. 몸매는 할머니가 되어서 더 날렵해졌고, 잔근육으로 가득한 등과 어깻죽지는 이소룡의 등을 닮았다. 새벽부터 날이 저물 때까지 어머니는 쉼 없이 일을 하고 책을 읽고, 일기를 썼다.
--- p. 20
평생 해외여행 한 번 못 가신 어머니. 손가락이 갈라지고 굳은살이 박이도록 일만 하며 살아오신 어머니. 한푼 두푼 모아 자식들 뒷바라지한다고 1,000원짜리 속옷 하나도 마음대로 사신 적 없는 어머니. 그렇게 살아오신 당신께서 여든 살 할머니가 되어서 비행기를 타고 길을 나선다.
--- p. 25
장엄한 안나푸르나 산군과 성스러운 칼리간다키 강이 지켜주는 신성한 땅. 어머니는 그곳에서 부처님께 소원을 빌면 행여 소원이 이루어질까, 빌고 또 빌었다.
“부처님, 이 세상 사람들이 세 끼 밥이라도 굶지 않게 해주이소.”
--- p. 28
지난 닷새 동안 알타이산맥에서 지냈는데, 타왕복드 베이스캠프에서 야영을 하다가 하루 종일 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탈출하며 죽을 뻔한 고비도 넘겼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알타이산맥의 산정 호수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문명 세계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이틀 정도 에너지를 충전한 다음, 러시아에 속한 알타이 공화국을 거쳐 파미르고원으로 내려가려고 합니다. 열흘 남짓 아무 소식이 없어서 걱정하고 계셨을 텐데, 타왕복드 베이스캠프에서 눈보라를 뚫고 탈출하기 전 고요한 아침에 찍은 사진을 보냅니다.
--- p. 67
정말정말 힘든 여정이었지만, 어머니의 환한 미소를 보았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 p. 85
어디를 가든, 길 위에서 어머니는 최고령 순례자였다. 네팔에서 만난 유럽의 할머니들과 몽골에서 만난 일본의 할아버지들은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고 존경의 인사를 보냈다. 그렇게 길 위에서 어머니는 최고령 순례자이자 모험가가 되었다.
--- p. 90
모든 게 엊그제 같은데 내 자식들이 벌써 다 자랐다. 어린이날이 오면 온갖 계획을 세워서 마산과 부산으로 아이들을 데려갔었지. 참 즐겁고 기쁜 날이었다. 자라서 세상을 뒤흔들 것 같았던 우리 아들, 딸. 두 사람이 아름다우면 좋겠다. 아들, 딸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 p. 111
저녁에 이웃분들과 돼지고기 파티. 잘 먹고 와서는 아들과 충돌. 요즘은 늘 충돌한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아들이 이상한 것 같다.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나의 자유를 탄압한다. 이렇게는 못 살 것 같다. 이렇게 사느니 어디라도 떠나고 싶다.
싫다. 이 나이에 이렇게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다니.... 내가 얼마나 더 산다고 이렇게 탄압을 하나?
--- p. 114
일흔여덟 생일날.
참 세월이 빨리 지난 것 같다. 오전에 보건소에서 침을 맞고 돌아와서 잠시 콩을 까고, 가을 햇빛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다가 미역국 한 대접 먹고, 잠시 우리 엄마를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참 외롭고 쓸쓸하다. 이렇게 나 홀로 앉아서 무엇을 할까? 저 먼 곳에 가서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 지나온 나의 시간, 어린 자식을 키우던 그 시절…. 이제 약 먹고, 잠이나 자면서 잊어야지.
--- p. 125
좀솜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3시에 지프차에 열다섯 명이 콩나물처럼 붙어 앉아서 사막과 같은 길로 네팔 음악을 들으면서 한 시간을 달렸다. 한 시간을 오는 동안 주변이 온통 사막 같고, 내 입에서 아~아~아~ 감탄이 흘러나온다. 5시경에 네팔 누나 동네에 도착했다. 다리를 건너 운치 있어 보이는 길가에 아낙네 여섯 명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우리가 전생에 형제였는지 네팔 누나를 바로 알아보고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 p. 153
감자를 캤다. 대단하다! 자연은 거짓이 없다. 인간보다 거룩하다. 이춘숙도 대단하다.
--- p. 192
새벽 4시 15분에 일어나 바이칼 호수의 달을 보며 기도했다. 5시 정각에 완전 무장을 하고 지팡이를 짚고 숙소를 출발. 새벽 공기가 차갑지만 기분은 좋다. 바이칼 호수의 칼바람을 맞으며 네팔에서 눈사태로 죽은 산악인들과 지진으로 죽은 희생자들을 기리며 절을 올린다. 그리고 바이칼 호수의 신을 불러본다. 살아생전에 또 올 수 있을까?
--- p. 223
일어나서 야영장에 놀러 온 낙타들과 사진 찍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발. 가도 가도 사막 길, 정말 대단하다. 도중에 또 낙타 떼가 나타났다. 내가 옆에 가서 아리랑을 부르며 춤을 추니 마치 나를 환영하고 기뻐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한 시간 가까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인간으로 환생하기를 빌면서....
--- p. 244
세계에서 가장 성스러운 산, 카일라스. 죽을 각오를 가슴에 품고 아침 9시에 출발. 이 신비로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까? 천년의 역사가 잠들어 있는 사원의 토굴에서 머리가 닿아서 조심히 절을 했다. 토굴은 어둡고 낮고 좁았지만 부처님이 계시는 느낌이 무섭도록 들었다.
--- p. 275
새벽 3시 15분.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비 내리는 새벽을 향해 불빛을 비추어본다. 왜 눈물이 나는지... 부처님께 기도한다. 이제 그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그곳에 계시는 많은 분들이 그립다.
--- p. 284
가을 하늘, 바람, 단풍, 나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으리... 마늘, 밀, 유채밭에서 일을 마치니 오후 6시가 다 되었다. 아랫집 할머니께서 구루마에 배추와 무를 싣고 오셨다.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난다. 농사짓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데 이렇게 늘 받기만 한다. 할머니를 위해 기도드리고 배추를 절여놓는다. 할머니가 주신 김장 김치에 밥을 맛있게 먹고 꿈나라.
--- p. 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