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인 인은 전 우주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인류 전체의 조상이다. 몇 만 년 전, 혹은 몇 백만 년 전... 정확히 언제부터 문명을 일구고 우주를 여행하며 식민지를 개척했는가 하는 점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아득한 과거 어느 땡니가 거주 가능한 행성을 찾아 전 우주로 퍼져나갔다. 테라,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역시 그런 식민지 중 하나였다. 그런데 당시 그들에게는 광속보다 빨리 상호 소통을 가능케 할 통신 수단이 없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식민지 상호간에 연락은 끊기고 말았다. 사람들은 헤인을 잊고 자신들이 거주하는 행성의 환경에 맞추어 변화하기 시작했다. (혹은 자연적인 변화가 아니라 헤인 인의 실험이었다는 추측도 있다)
예를 들어 <어둠의 왼손>의 배경이 되는 겨울 행성 게센에서 인류는 더 이상 양쪽 성을 갖춘 생명체가 아니며 상대에 따라 여성 혹은 남성으로 변하는 종족이다. 또 행성 로캐넌에서는 분명 인간처럼 보이지만 날개가 달린 종족이나, 중세 유럽의 전솔 속에 등장할 법한 난장이 요정들도 듲아한다.
그렇게 각 행성이 따로 고립되고 긴 세월이 흐른 후, 헤인 인은 다시 우주를 돌아다니며 자신들의 옛 식민지를 찾고 새로운 관계를 구축한다. 이 때 테라(지구) 역시 헤인과 맞닿뜨렸다. <빼앗긴 자들>에 등장하는 테라 인 외교 대사의 입을 빌리면, 당시 테라는 전쟁과 환경 파괴로 끔찍한 고갈 상태에 있었고, 헤인의 도움을 받아 우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헤인과 테라는 손을 잡고 함께 다른 행성들을 찾아다니며 전 우주에 평화로운 연합을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우주선과 통신 수단이 광속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에 각 행성이 서로의 존재를 안다고는 해도 연합이 결성되기에는 장애가 많았다. 이런 상황은 세티 항성계에서 마침내 광속을 뛰어넘는 통신 수단인 <앤서블>이 발명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헤인의 작품 세계 중에 이 시기를 명확하게 그린 소설은 없으나 앤서블의 발명 이후 헤인과 테라를 중심으로 <아홉 개의 알려진 세계> 사이에 우호적인 우주 연합이 성립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적>이 나타났다.
이 <적>에 대해 분명한 설명은 없다. <로캐넌의 세계> 같은 경우에 평화로운 연합이 적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음을 잠깐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로캐넌의 세계>에서는 분명 어떤 전투에 대한 언급이 있고, <유배 행성>에는 고향 행성에서 멀리 떨어진 세계에 고립되어 버린 외계인들 사이에, 먼 옛날 언젠가 있었던 전투에 대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지만, 그들이 우주선과 앤서블을 잃고 다른 행성에 유배되어 있다는 점을 빼면 정확히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헤인이 아무런 조건도, 제약도 없이 만나는 행성마다 자신들의 문명과 기술, 우주선을 제공했으며 철저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일어난 불온한 반란자들이었다는 설도 있고, 외 우주로부터 온 적 같은 것은 없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적, 혹은 적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있었다는 사실이며, 그에 따라 헤인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각 행성들간의 소통은 끊어지고 만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 600여 년 후, <적>은 사라지고 헤인은 다시 우주를 탐사해 나가며 새롱누 연합을 결성하려 한다. 이 시기에는 새로이 탐사와 연합을 주도하는 행성 <에커먼>이 등장하며, <어둠의 왼손>에서 겨울 행성 게센과 동맹을 맺기 위해 파견된 대사 겐리 아이는 에커먼 인이다. 단편집 <세계의 탄생일>에는 에커먼을 배경으로 하는 단편도 몇 편 수록되어 있다.
헤인 시리즈란 위에서 간략하게 설명한 세계관과 배경을 공유하면서 각기 다른 세계와 시대, 인물과 이야기를 다루는 일련의 장 단편 소설을 일컫는다. 이 시리즈는 1966년, 르귄의 첫번째 장편소설이기도 한 <로캐넌의 세계>를 시작으로 하여 가장 최근에 발표한 단편집 <세계의 탄생일 The Birtheday of the World >에 이르기까지 어슐러 르귄의 작품 세계 전반을 관통하고 있다. 르귄은 이 헤인 시리즈로 SF 문단 최고의 상이라 할 수 있는 휴고 상과 네뷸러 상을 합이 일곱 차례나 수상하기도 했다.
사실 헤인 시리즈에 속하는 어느 작품도 헤인 인이나 헤인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각 소설은 로캐넌, 게센, 에큐멘, 웨렐 등의 각기 다른 행성을 배경으로 펼쳐지며, 대개 다른 행성과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들, 사고 방식이 다른 사람들 간의 충돌과 이해를 주로 다룬다. 줄거리 속에서 헤인과 우주 연합의 역사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언급만 있을 뿐이고, 때로는 이 소설에서 이야기된 바와 저 소설에서의 언급 사이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때도 있다. 그러나 아득한 선사시대에 대한 기억은 종종 잊혀지고, 왜곡되고, 전설로 바뀌며 같은 사건이라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런 설정이야말로 소설에 한층 현실적인 배경을 부여한다고 하겠다.
<어둠의 왼손>과 함께 헤인 시리즈 최고의 장편으로 손꼽히는 본서는 헤인과 테라가 우주 연합의 결성을 위해 노력하던 시기, 세티 항성계의 대조적인 쌍둥이 행성 우라스와 아나레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우주 연합을 가능케 한 앤서블의 이론적 아버지인 주인공 쉐벡은 고향 아나레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금지되어 있던 우라스로의 여행을 감행한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환경을 현명하게 관리하고 있는 우라스는 우리의 눈에 낙원이나 다름없는 행성이지만, 쉐벡의 여정은 이런 낙원이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에 반해 오도니안 사상(이는 작가 본인도 말했다시피 아나키즘의 변용이다)에 기반하고 있는 행성 아나레스는 환경은 황폐할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진정한 평등과 자유를 실현한 또 다른 유토피아이다. 서로가 상대방의 달이자 그림자인 이 두 행성의 설정은 본서가 출간된 시기가 히피 문화와 반전 운동, 아나키즘의 부흥이 일어난 1970년대라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으며, 자유와 평등, 진정한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것인가 하는 소설 속의 질문 역시 그와 같은 맥락 속에 있다. 내용상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면 헤인이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지만, 본서에 잠시 등장하는 헤인 인 케토가 1966년에 나온 첫번째 헤인 시리즈 <로캐넌의 세계>에서도 얼굴을 내민 인물이라는 것은 재미있는 부분이다.
- 이수현
벽이 있었다. 그렇게 중요해 보이는 벽은 아니었다. 다듬지 않은 돌에 대충 모르타르만 발라 쌓은 벽이었다. 어른 키에는 미치지 못하고 어린아이라도 기어오를 수 있는 정도 높이에, 문이 나 있기는 하지만 구색만 갖춘 것일 뿐, 그 벽은 벽이 아니라 기하학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선, 하나의 경계선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개념은 실재였고 중요했다. 일곱 세대에 걸쳐 그 세계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벽이 다 그렇듯 그 벽도 양면을 향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 안이고 어느 쪽이 밖인가는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달려 있었다. 한쪽에서 보면 벽은 아나레스 우주항이라고 하는 60에이커짜리 황야지대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 안에는 커다란 캔트리(미사일이나 로켓의 조립, 조작용 작업탑-옮긴이) 크레인 몇 대와 로켓 착륙대 하나, 창고 세 채와 트럭 차고 하나, 그리고 숙소 한 채가 있었다. 튼튼해 보이는 숙소는 때묻고 음침한 데다 정원도 아이들도 없었다. 아무도 살지 않았거나, 살았더라도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사실상 격리였다. 벽은 착륙지만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내려오는 우주선들을, 그리고 우주선에 타고 오는 사람들을, 그 사람들을 보낸 세계를, 나머지 우주 전체를 차단했다. 그 벽은 아나레스를 바깥에 남겨둔 채 전 우주를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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