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은 마를 팔아먹고 살다가 운이 좋아 공주를 아내로 맞은 이야기 속 인물일까, 아니면 역사 속에 등장하는 마한의 그 무강왕일까? 신화는 스스로 정지되어 있기를 거부한다. 비유와 상징, 전도와 역설 등 일상적 언어와 일반적 사고를 벗어나기도 한다. 익산의 미륵사지, 미륵사지9층석탑, 왕궁리5층석탑, 쌍릉 그리고 화순 운주사와 나주 반남고분 등 마한의 역사와 관련 있는 현장에 대한 신화학적 해석을 통해 새롭게 부활한 마한신화.《남도문화의 서막, 마한신화》는 역사와 신화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면서 한 편의 추리소설처럼 흥미롭게 전개된다. 그 내용을 더듬어보자.
1. 역사와 문학을 섞어버린 일연의 무리수
정통 사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삼국유사?는 일종의 위서(僞書)로 간주된다. 일연은 아무리 예찬해도 부족할 정도로 공이 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장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전승자료에 분식과 훼손을 너무 심하게 가했다. 일연의 무왕에 대한 기록은 이런 점에서 그의 공과 실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는 정사에서 빠진 부분을 채우면서 야사를 실증하고자 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질을 달리하는 역사와 문학을 섞고자 했던 일연은 결과적으로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2. 무강왕과 백제, 그 쌍방의 피고에 대한 논고
서동요의 배경설화로 더 잘 알려진 무왕설화의 원전에서는 무왕이 백제의 무강왕으로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백제라는 왕조와 무강왕이라는 왕명이 서로 어긋나고 있어, 일연은 실증사학적인 입장에서 무강왕을 무왕으로 왕명을 고치고, 백제의 무왕시대와 동시대인 신라의 진평왕을 끌어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무강왕을 백제 무왕의 오기라고 판단해버린 일연이 예상하지 못한 사실들이 있다. 무강왕이 오기가 아니라 백제가 오기였을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백제와 무강왕이 서로 역사상 공존할 수 없다면, 그 혐의는 무강왕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백제도 의심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연은 쌍방의 피고에 대한 논고가 아니라 일방의 피고에 대해서만 의심을 했다. 백제에 무강왕이라는 왕명이 없어 무왕으로 고쳐놓은 그의 작위적 판단과 행위는 역사와 설화에 대한 폭거이다.
3. 미륵사 창건의 수수께끼
미륵사는 그 자체가 수수께끼이다. 특히 미륵사9층석탑은 불교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대한 역사(役事)였다. 법왕 때 시작하여 무왕 때까지 부여의 왕흥사를 짓기 위해 국력을 쏟고 있는 사이에, 역시 무왕 때 그 거대한 역사인 미륵사를 짓기 시작했을 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만약 그랬다면 그 사실이 정사인 ?삼국사기?에 언급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창건설화만 전할 뿐, 미륵사 창건의 역사는 사라져버렸다. 무왕시대에 미륵사가 창건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언제 그 절이 만들어졌을까? 마한의 무강왕이 그 절을 만들었다고 하면 수수께끼가 풀릴까? 그렇지 않다. 위만조선은 기원전 194년에 세워졌으며, 백제 무왕의 제위기간은 서기 600~640년이다. 무강왕이 창건했다고 한다면 기원전 2세기의 일이어야 한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훨씬 전의 일이다. 그러면 누가 미륵사를 창건했을까?
4. 마한의 무강왕과 쌍릉의 사실관계
무강왕이라고 하는 신화상의 인물과 쌍릉이라고 하는 무덤간의 사실 관계는 무엇일까? 무강왕이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을 지칭한다면, 쌍릉에 묻힌 주인공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쌍릉은 7세기에 조성된 무덤의 양식으로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쌍릉이 무강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이라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분명히 해야 할 것, 그것은 바로 쌍릉이 7세기에 조성되었다는 것이며, 그와 관련된 설화는 많은 의심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설화보다는 무덤이 훨씬 신빙성이 있는 물적 증거물이며, 그런 점에서 쌍릉의 존재는 무강왕과 미륵사를 연결지을 수 있는 촉매가 될 수 있다.
5. 미륵사와 무강왕의 1천년이라는 간극
7세기에 조성된 미륵사와 쌍릉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쌍릉의 주인공이 실존인물이고 미륵사를 창건했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러나 무강왕은 미륵사 창건 1천년 전의 인물이다. 그 간극을 메울 방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강왕의 무덤은 미륵사의 조성과 때를 같이 하여 존재하고 있다. 이런 미궁에 부딪혀 일연은 무강왕을 무왕으로 변신시켜 놓았다. 역사적으로 미륵사는 마한의 무강왕과 상관이 없다. 그 간극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신화의 반복성이다. 역사가 일회적인 데 반해, 신화는 반복적이다. 신화는 신축성과 융통성이 있어 그것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 재현된다. 무강왕신화가 그렇다.
6. 미륵사 창사에 왜 하필 무강왕이 필요했을까?
미륵사를 창사한 내력에 왜 무강왕이 관여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상황의 유사성과 역사적 필요성 때문이다. 마한의 무강왕이 다시 살아나 미륵사를 창건할 수는 없다. 이것은 역사에서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설화의 세계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문제는 미륵사의 창사에 왜 하필 무강왕신화가 필요했는지 그 까닭을 밝히는 것이 요체이다. 백제의 역사 속에는 그 당시까지 마한이 사라지지 않은 채 자리하고 있었다. 고고학적으로 백제와 마한은 거의 7세기경까지 공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역사적 실체로서 마한은 백제 근초고왕 때 정치적으로는 멸망했을지라도, 여전히 백제가 망할 때까지도 독자적인 문화권을 구성하면서 존속하고 있었다. 그들이 지녔던 독자적인 외교권은 지금도 남도지역에서 발굴되는 여러 형태의 무덤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7. 견훤이 마한을 거론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어 온 문화적 구성체로서 마한을 아우르는 것은 후백제를 건국하는 견훤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역시 마한을 거론했던 까닭, 견훤의 탄생설화가 서동의 탄생설화를 닮은 까닭은 정치적인 계산이었으며, 그는 이를 통해 한때 후삼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다. 그러나 그의 몰락에는 또 다른 마한이 작용한다. 나주를 중심으로 한 마한 세력은 견훤의 정치적 계산을 간파하고 신흥세력인 왕건과 손을 잡는다. 견훤은 마한과 백제의 정통성을 함께 계승하고자 했으나, 백제와 계통을 달리한 마한의 최후 세력들은 견훤과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록의 주체가 아니었다. 기록은 백제 왕권에 의해 독점적으로 행사되었으며, 그것이 후세에까지 전해지게 된다. 따라서 마한의 역사는 기억으로 전하며, 그것은 신화나 전설의 형태를 띠게 된다. 왕흥사의 창건 주체가 백제 왕권이었고, 미륵사의 창사 주체가 마한 세력이었다고 할 때, 훗날 사가들이 입수할 수 있는 기록자료가 어느 쪽이었을까는 너무나 자명하다.
8. 미륵사는 마한의 부흥을 꿈꾸던 세력들이 만든 절일까?
망해가는 백제에 의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마한 세력들은 독자적인 왕궁을 건설하고, 미륵신앙을 필두로 한 구심점을 확보하기 위해 미륵사를 조성한다. 그런데 미륵사의 조성을 위해서는 계시가 필요했다. 마한의 잔여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서는 미륵신앙뿐만 아니라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신화적 인물의 계시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무강왕과 선화공주였다.
9. 시간과 공간을 소거하는 신화의 현실 이입
신화적 세계를 그리워하면서 마한의 후예들은 새로운 왕궁의 터를 닦는다. 그것은 무강왕이 마한을 지배했던 금마저라는 땅에 마한의 영광을 재현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왕궁이 있었다고 전하는 왕궁리에 왕궁평성을 축조했고 5층석탑을 세웠으며, 미륵사를 창건하는 대역사를 거행한다. 익산시 석왕동에 자리한 쌍릉도 그때 1천년 전 마한을 지배했던 무강왕의 능으로 새롭게 조성했을 것이다. 주체사상의 이념적 철저화를 위해 반만년 전에 죽었던 단군의 능을 평양에 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선진 문물을 선사해준 무강왕을 마한의 후예들은 잊지 못했다. 역사적 인물이 시간과 공간을 소거하는 신화를 통해 현실로 이입할 수 있도록 그들은 무강왕의 능을 조성한다.
10. 의향의 원천이자 예향의 단초가 된 마한신화
서동이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불렀던 서동요가 천년 뒤 마한의 후예들에 의해 다시 불리게 되면서, 이제는 속임수가 아닌 간절한 소망을 담은 노래가 되었다. 이들의 소망은 뒷날 백제의 부흥을 꿈꾸는 저항정신으로 거듭났으며, 통일신라 정권을 대상으로 했던 가열찬 투쟁사는 훗날까지 집단적 인성으로 유전되면서 호남을 의향으로 자리매김하는 정신사적 원천이 되었다. 또한 최초의 석탑인 미륵사탑을 조성했던 그들의 놀라운 솜씨와 목재에서 석재로 탑재를 바꾼 놀라운 감각은 또 다른 하나의 유전인자로 전해지면서 호남을 의향으로 이름하는 단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