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팔자에 무슨 책을.’ 나 역시 팔자타령을 했다. 확실히 늙기는 늙었다. 하지만 71세의 이 나이에 글 쓰고 일을 한다. 제법 찬란한 삶을 살고 있는 할머니다. 새벽에 일어나 정적을 깨기 위해, 더 솔직히 말하자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텔레비전을 켠다. 귀가 아직 가지 않았다. 텔레비전 속 말소리, 음악 소리 다 들린다. 텔레비전을 끄고 글을 쓴다. 손가락도 아직 가지 않았다. 혼자 피식거리며 때로는 눈물 찔끔거리며 노트 여백을 채워간다. ‘잘 하고 있어, 연홍아!’ 셀프 칭찬도 하면서.
--- p.3
학교 다닐 때는 엄마가 싸 주던 도시락을,
이제는 71?세가 된 내가 싸서 학교가 아닌 일터로 간다.
길마다 햇살이 내 친구가 되어 주어 감사하다.
건강한 몸이 있으니 이 나이에 일을 할 수 있어 감사하다.
거기다가 말 못하는 아기도 좋아한다는
돈도 벌 수 있어 감사하다.
어린이집 등원을 하는 아이가
자신의 새 신발을 자랑하면서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아이의 웃음을 볼 수 있어 감사하다.
따뜻한 봄이 다가왔다. 꽃과 쑥이 나왔는지 궁금하다.
새로운 봄날을 71?번이나 맞이할 수 있어 감사하다.
연홍이의 삶은 오늘도 감사로 넘친다.
--- p.15
나는 오늘, 미소를 건넸을까.
고맙다는 말 한 마디 건넸을까.
사과를 해야 할 때는 진심으로 마음을 표현했을까.
이런 소소한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인데,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면 내 마음의 눈은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하루의 시간 속에서
세상을 밝게 비추어 주는 눈으로 살아야겠다.
--- p.27
광고지 붙이는 아르바이트생이 나와 마주쳤다.
“괜찮아. 붙여.” 이야기했지만
아르바이트생은 급히 자리를 피했다.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는 건데. 괜찮은데.
그래서 나는
광고지 붙이는 아르바이트생과 마주치게 될 때마다
용기 내어 이야기할 거다.
“괜찮아. 붙여.”
--- p.33
내 입에 사탕을 넣어주던 언니도,
같은 집에 살면서도 떨어져 통화해야 하는 가족도,
슬프지만 사랑 이야기다.
힘든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속에서 서로를 그리워하고
서로에게 미안해하는 마음,
그것이 사랑인 것이다.
언니가 어서 빨리 나아서 내 입에 사탕을 넣어줬음
좋겠다.
--- p.51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꽃,
보면 볼수록 또 보고 싶은 꽃,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예뻐지는 꽃,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이 마음이 넉넉해지는 꽃,
울어도 예쁘고, 똥을 싸도 예쁘고, 떼를 써도 예쁜 꽃,
그 꽃은 바로 우리 아이들이다.
일하면서도 웃을 수 있고 아이들하고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곳.
나의 일터가 참 좋다.
--- p.60
주민은 기사님께 드리고 기사님은 나에게 주시고
나는 택배 총각에게 주고,
박카스 한 병이 돌고 돌아 서로에게 행복이 되어 주었다.
조그마한 박카스 한 병이 사랑을 싣고 여기저기 다니는 것이 신기하다.
행복이 뭐 별건가.
이렇게 우리는,
박카스 같은 에너지를 가지고 행복 전도사가 된다.
--- p.70
그래서 나는,
인생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젊음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는 너희들이 부러워.
그리고 부러운 것을 부럽다고 말할 수 있는 나는 행복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살면서 제대로 느끼고 있으니 이 또한 행복해.
나? 글 쓰는 할머니잖아.
나? 직장인이잖아.
어때? 이 정도면 멋지지 않니?”
--- p.78
얼마 전, 회사에서 탄 상장이 눈에 들어왔다.
회사에서 일한 지 10년 되었다고 준 상장이다.
금일봉도 들어 있었다.
자랑할 데가 없다.
옳지!
나는 텔레비전 화면 속에 나오는 이름 모를 연예인에게
상장을 펴 보였다.
“나 잘했죠? 돈도 받았어요. 직원들 점심 사 줄 거예요.”
나 혼자 웃었다.
--- p.88
내 평생, 가장 잘한 일을 다시금 만들 수 있게 아버지와 엄마를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회갑 잔치도 멋들어지게, 손목시계도 더 반짝이는 걸로, 금반지 무게도 더 나가는 걸로 해 드리고 싶다. 그러고 싶다.
--- p.116
엄마는 55세에 아빠와 헤어져 홀로서기를 하셨다. 엄마의 선택을 이해했고 충분히 공감이 갔지만,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가족을 위해 헌신만 하셨던 엄마는 홀로서기 이후, 곰팡이 냄새가 나는 달셋방에서 10년을 사셨다. 엄마가 안쓰러웠지만 곰팡이 냄새가 싫어 자주 가지 않았다. 가끔 그 집을 들릴 때면 엄마는 항상 웃고 계셨다.
“엄마! 여기 곰팡이 냄새가 너무 심한데 그래도 좋아?”
“그럼, 좋지. 천국이 따로 있니? 내 마음이 편한 곳이 천국이지.”
그제야 나는 엄마만의 천국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엄마의 홀로서기를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 p.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