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와카마쓰의 일생도 소개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비록 심정적으로는 ‘불편한’ 총독부의 일제 관료였지만, 일본 해군의 레거시(legacy, 유산)가 된 이순신 영전에 엎드려 기도하는 일본 장교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목화재배와 천일염전 개발이라는 적산敵産의 레거시를 남기고 한반도를 떠난 와카마쓰도 있는 그대로 전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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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마쓰는 어릴 적부터 동네 사람들이 알아주는 총명한 아이였다. 한자를 어린 나이에 익혔고, 여섯 살 때 막 창설된 모리소학교에 최연소로 입학해 나이가 많은 아이들과 어울려 공부했다. 모리소학교에는 두 학급이 있었는데, 1반에는 다섯 살 위인 둘째 형 도요조가 있었고 와카마쓰는 2반에 속했다. 소학교를 마쳤을 때 아홉 살이었으나 시골 중에서도 완전히 시골인 모리무라에는 진학할 공립학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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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도시샤정법학교 설립 여부를 두고 찬반이 엇갈려 학내가 시끄러웠는데, 와카마쓰는 이에 반대하면서 “그런 학교를 굳이 세우려면 도쿄에 설립하라”고 반발한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 일로 와카마쓰는 학교 당국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러니 예비학교 교사로 채용하겠다는 제안은 그야말로 뜻밖이었다. 와카마쓰는 고민 끝에 고사키 교장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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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데하라와 와카마쓰는 성격도 인생관도 달랐다. 와카마쓰는 번뜩이는 처세와는 거리가 멀었고, 외무성의 ‘내부 정치’도 모르는 고지식한 스타일이라서 외교관으로서는 영사에 그쳤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 속에서 외교관의 직무를 내려놓고 통감부와 조선총독부의 지방관리인 이사관과 부윤으로 전직하여 평생 중요한 시기 대부분을 한반도에서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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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돌아온 와카마쓰는 외무성에서 통상국 과장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통상국에 오래 다니지 못하고 다시 해외근무를 지망했다. 이 무렵 ‘양심적’인 와카마쓰는 다나카가 어린 시절 이래 오랫동안 지원해준 학비를 다달이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큰형 마사타로가 실직해서 별다른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와카마쓰 한 사람 수입으로 대가족이 생활해야 하는 곤궁한 형편이었다. 그래서 국내에서 근무하는 외무성 직원의 급여로는 가족을 부양하기 어려웠다. 해외특근 수당이라도 받아야 했기에 와카마쓰는 외국 근무를 희망했다. 그 결과 외무성 안에서 인맥이 엷어져 출세에는 마이너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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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에서 보고한 내용이 도쿄에 전달되자 농상무성을 비롯한 관계 관청과 방적업계는 물론 정계 유력자들도 환영 일색이었다. 전라남도 지방은 고려 말기 이래 재래종 목화의 주산지였다. 이곳에서 난 목화는 일본종과 다르게 방적원료로 많이 쓰였다. 그래서 상당한 생산량이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조선종 재래면은 미국종보다 품질이 떨어지고, 경작법이 원시적이어서 물량이 적었으며, 대량수출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목포의 풍토가 미국종 재배지로 기대를 모으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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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농작물과 달리 면화 재배에는 농약이나 비료를 아주 적게 사용하기 때문에 친환경적인 농산물일 뿐 아니라 자원 절약, 에너지 절약형 섬유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지구상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의류의 주요 성분인 화학섬유는 원료가 석유다. 화석연료도 화학섬유도 친환경이 아니기에 여러 문제를 낳고 있다. 이에 반해 목화는 햇빛과 공기가 있고 토양만 적합하다면 영구적으로 활용 가치가 있는 친환경 농산물이다. 목화가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 신성장의 동력원이 될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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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대부분이 반농반어(半農半漁)의 농어촌에서 부업으로 소금을 제조하는 실정이었다. 설사 어민들이 천일제염의 유익함을 인정한다 해도 염전 개척 비용을 짊어지고 새로운 경영에 도전하리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활성화되지 않으면 ‘천일제염 생산체제를 대대적으로 정비해 외국 소금 수입을 저지하겠다’는 본래 목적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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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마쓰 영사가 일부러 보고하지 않은 것은 ‘국가의 외교문제에 대처해야 할 공사관에 이런 지방 분규를 보고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러?일 사이에 전쟁 분위기가 급박하게 번지면서 언제 국교단절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공사관은 밤낮없이 매우 바빴다. 또한 인부 소란 사건은 그때까지 몇 차례 일어났고 그때마다 해결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목포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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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마쓰는 도시샤 이래 기독교를 신봉해온 덕분에 길 목사와 대화하면서 상당 부분을 이해하고 서로 공감할 수 있었다. 대화록이 없기 때문에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와카마쓰는 일본 관료로서 한계를 감안하고라도 한일 양국의 공생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해서 노력하고 싶다고 호소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민족정신을 대변하는 길 목사가 납득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와카마쓰는 자기 마음을 이해해준 길 목사에게 마음 깊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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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인천거래소에는 주민 반발에 대비해 옥외 경계에 경찰관 70여 명이 배치되고 소방차까지 동원되었다. 오후 4시 30분이 되어서야 임시총회가 열렸다. 와카마쓰 사장이 의장석에 앉아 제안 이유를 설명했지만, 반대파가 처음부터 방해하는 바람에 소란이 일었고 주주들끼리 논쟁이 붙어 폭력 사태까지 벌어지게 되자 6시 50분에 휴회했다. 옥외 군중 사이에서도 돌을 던지는 등 폭력 사태가 벌어져 여러 명이 붙잡혀갔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한밤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결국 휴회 상태로 폐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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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초반 미국과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일본에 살던 한국인은 경찰의 감시와 박해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심했다. 재일 한국인은 불가피한 일로 한국에 잠시 왔더라도 다시 일본으로 입국할 수 없었다. 그때 수많은 한국인이 ‘한국통’인 와카마쓰에게 찾아와 해결을 부탁했다. 와카마쓰는 거절하지 않았다. 귀찮다는 내색도 하지 않고 그들을 대신해 경찰부장 같은 관리들을 만났고, 각처의 경찰서에 몸소 나가서 딱한 사정을 설명하고 한국인이 재입국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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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사와 만나게 된 것도 와카마쓰 탐사가 계기가 되었다. 빠른 시일 안에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로 다짐하던 차에 와카마쓰의 직계 후손과 연락이 됐다. 그 집에서 자라서 50년 전에 이사했다는 손자손녀들도 합류해 첫 대면을 했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저택에 신구 거주자와 연구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진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근처 신여당 한쪽에 모셔둔 와카마쓰 일가의 묘에도 들러 예를 올렸다. 와카마쓰는 한국 근무를 마치고 1927년 교토로 돌아가 20여 년을 살다가 1953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84세 때였다. 시력이 나빠져 차를 피하지 못해 생긴 사고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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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여덟이면 형제자매라 해도 성격이 다르고 생김새도 제각각이다. 아버지 와카마쓰를 가장 닮은 자식은 넷째 딸 모미지와 둘째 아들 시히로이고, 나머지 자식들은 어머니 소마를 닮았다. 와카마쓰는 아이디어 내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것을 쉽게 받아들이는 반면 우유부단했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성적이 좋고 명석한 자식을 더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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