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여행에 동행하는 사람들이 내게 묻곤 한다. 다녀와 글을 쓰려면 열심히 돌아보고 사진도 찍고 해야 하는데 마치 그곳에 살고 있었던 사람처럼 느긋해 보이는 것이 의아했던 모양이다. 고백하자면 나의 진정한 여행은 그곳에서 돌아오면서부터 시작된다.
가만히 눈을 감고 시간을 거슬러 가보면 그때는 보지 못했던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빼곡하게 다시 펼쳐진다. 바람의 방향으로 몸을 누이고 살아가는 어느 나무 한 그루의 깊은 숨소리, 소읍의 늙은 거리에서 풍겨 나오던 비릿한 생선 내음, 골목을 안내하며 손을 잡고 뛰어가는 천진한 웃음소리. 내 모든 여행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채 언젠가의 어느 곳, 길 위에 서 있다.
--- 「머리말」 중에서
나그네의 길을 안내하는 외씨버선길의 보라색 리본이 흩날린다. 자연에서 분리된 것만 같은 색인 모호한 보라가 뜻밖에 연둣빛 숲과 잘 어울린다. 보라를 좋아하는 나는 내내 길을 걸으며 먼저 떠난 사람과, 그 길을 걷는 우리와, 다시 그 발자국을 포개며 걸어올 누군가를 떠올리며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질 것만 같은 조붓한 버선길을 딛고 디뎠다.
--- p.17~18,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외씨버선길」 중에서
그래, 남겨둔다.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두고두고 남겨두었다가 삶에 치여 흙투성이 무릎을 털면서 오거나, 더 이상 오를 것이 없어 사는 것이 시시해질 때 오만함을 주머니에 푹 찔러 넣고 오면 된다. 사과꽃향기 머무는 봄도 좋고, 은행잎 황금빛 주단 펼쳐 밟고 오르는 가을도 좋고, 천년을 거슬러 선묘각 가는 길에 하얀 발자국 내보는 어느 눈 오는 날은 더욱 좋고.
--- p.26, 「극락으로 가는 문과 누-부석사」 중에서
지나가는 슬픔, 지나가는 골목, 지나가는 당신, 지나가는 환희, 지나가는 사랑, 지나가는 감기, 지나가는 주소, 지나가는 나무, 지나가는 비, 「지나가는’이란 말은 너무 서늘하잖아. 세상 모두는 진정 다 지나가고야 마는 것인가.
--- p.89, 「바다에 핀 연꽃섬-통영 연화도」 중에서
‘오래된 미래’라는 말의 의미와 ‘새로운 과거’라는 말의 뜻은 다르지 않다. 퇴색되어 낡고 늙은 과거에는 그것만이 품을 수 있는 시간 속 서사가 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살았던, 살고 있는, 앞으로 살아나갈 사람과 사물이 있다. 세 갈래 시간이 만나 흐르는 물결, 열대의 물속에서 서로 엉키어 지탱하는 맹그로브 나무의 뿌리처럼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힘을 가진다. 미래는 나의, 우리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직시하는 과거에서부터 시작이다.
--- p.101, 「세 갈래 물결이 만나 일렁이는 나루-밀양 삼랑진」 중에서
돌아본다, 라는 말은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아닐까.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상처는 보듬어 살펴주어야 하고 품어야 할 기억은 새기면서 이어가고 싶다. 모든 끊어진 것들은 시간이 필요할 뿐 언젠가는 하나로 이어지리니.
--- p.164, 「기차는 간다-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중에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혼자 가는 여행의 준비가 어떤 때엔 귀찮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준비하는 꽤 오랜 시간을 떨림과 기대감으로 보낸다. 항공권을 예약하고, 여행 동선에 맞춰 잠잘 곳을 정한다. 도시에서는 야경을 볼 수 있게 넓은 통 유리창 있는 숙소를, 해변이라면 일출은 볼 수 있는지, 노을은 어디로 지는지, 잠잘 곳만 정해지면 나머지는 유동적인 일정으로 마음 닿는 길을 걷기만 하면 된다.
--- p.194, 「동그랗고 부드러운 바람-대만 타이중」 중에서
세계에서 자전거 길로 유명하다는 달과 해를 담은 일월담, 낯선 곳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은 늘 옳다. 공기와 햇살, 윤슬진 강물과 함께 바퀴를 굴리는 시간은 의심 없는 안온함이다. 비가역성의 시간이지만 동그랗게 맞물려 돌아가는 자전거 바퀴처럼 처음과 끝이 돌고 도는 세상, 페달을 밟고서 일으키는 바람도 그저 동그랗게 세상 속으로 퍼져나간다.
--- p.196, 「동그랗고 부드러운 바람-대만 타이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