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에서도 ‘포기한다’와 ‘밝힌다’의 어원은 같다{‘포기한다(諦める)’와 ‘밝힌다(明らめる)’는 일본어로 똑같이 ‘아키라메루’라고 읽는다-옮긴이}. 무릇 우리가 사물의 본질을 ‘명확하게’ 밝히면 ‘포기할 수 있다’는 의식이 보다 강하게 작용한다. 가령 나이 들고 싶지 않다고 아무리 바랄지라도 ‘태어난 이상 나이가 드는 것’이 ‘명확’하므로 ‘노인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할 수 있다.
― 6쪽, 저자의 말에서
사물의 본질을 명확히 밝히지 않으면 포기할 수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본질을 밝히지 않고 경쟁 사회라는 고해(苦海, 고통의 세계라는 뜻으로, 괴로움이 가득한 인간 세상을 이르는 말-옮긴이)를 헤엄치면서 무작정 포기하려고만 한다. 그러니 도리어 스트레스가 쌓이고 괴로움이 느는 것이다.
나는 부정적인 감정이 솟구칠 때 일단 “어떻게 하고 싶은가” 하고 스스로의 사정을 헤아려본다. 그리고 그 사정이 이치에 맞는지를 생각한다. 덕분에 괴로움이 줄었다
― 35~36쪽, 서장_ 포기함으로써 마음을 대청소한다에서
하고 싶은 일을 주변에서 만류해도 내가 한다고 각오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했는지 안 했는지를 후회하기보다 그때 스스로 결정했는지, 자신의 의지로 움직였는지가 중요하다. “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사정이 있어서 못했다”이든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이든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면 후회는 없다.
그때는 너무 어렸다거나 생각이 짧았다는 후회는 남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어쩔 수 없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 일도, 하지 않은 일도 포기하지 못한 채 “아, 그때 할걸”, “그런 건 하지 말걸”이라고 읊조리며 후회로 점철된 인생을 보내게 된다.
― 87쪽, 1장_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정말로 ‘포기하는’ 것에서
성격이 급한 사람은 흑백(선악)을 서둘러 가리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하면 일어난 현상을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도 악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 나쁜 짓을 반성하고 선인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상대, 지역, 시대에 따라 악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불교에서는 어떤 일을 행한 후, 마음이 평안해지는 데 공헌하면 선이라 하고 마음을 흐트러트리면 악으로 본다. 선악은 시간적 결과라서 행한 시점에서는 판단할 수 없다.
― 121~122쪽, 2장_ 집착은 불안, 초조, 분노의 원천에서
혀를 차고 싶은 것도, 욕설을 퍼붓고 싶은 것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일의 크고 작음을 떠나 전부 내 사정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자각해야 한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기억하자. 처음에 ‘마음대로 되지 않아 화가 치밀었다’는 걸 자각하고 이어서 ‘세상은 그렇게 흐른다’고 납득하는 것이다.
― 146쪽, 3장_ ‘지나친 생각’이 하루하루를 숨 막히게 한다에서
열심히 티를 냈는데 관심과 인정을 받지 못하면 “누구도 나를 알아주지 않아” 하며 침울한 기분이 된다. 그럴 때 본당에 앉아 생각하다가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아무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나는 다른 사람을 얼마나 인정하며 살아왔던가. 스스로도 누군가를 오 분 동안 생각한 적조차 없으면서….” 그리고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아도 부처님은 인정해주실 거야”라는 두 가지 깨달음이다.
― 219쪽, 4장_ ‘비교하지 않는’ 행복을 일찌감치 깨달은 자가 승자다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다. 그 신념으로 매일을 살아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정당성을 아무리 주장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나는 옳은데 인정하지 않다니, 그렇다면 주변이 틀렸다’는 이론을 펼치게 된다. 자신의 정당함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은 틀렸다고 그를 혐오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괴로운 건 본인이다. 그저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가치관이 다르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라고 해두면 된다.
--- 261쪽, 5장_ 머지않아 모든 고민이 작게 보이기 시작한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