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0일은 5·18이 진압된 지 만 사흘이 되는 날이었다. 모든 신문과 방송은 계엄사가 요구하는 대로 광주에서 폭도들에 의한 유혈 사태가 일어났다고 보도할 뿐, 광주에서의 학살 혹은 광주에서의 항쟁 소식을 알지도 못했고 알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의기가 작성한 전단지 내용을 확인한 계엄군 지도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의기가 쓴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 광주의 진실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엄 당국은 도대체 어떻게 김의기가 그 사실을 알아냈는지 미치도록 궁금했지만 집 수색에 서는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 경찰은 수색 세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마장동 김의기 집을 찾아 비로소 김의기가 숨진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_ 44쪽, 김의기
김종태가 분신하면서 뿌린 전단지는 두 가지 종류였다. 하나는 「광주 시민·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제목의 세 장짜리 긴 글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명서」라는 제목의 한 장짜리 짧은 글이었다. 김종태의 단정하고 정성스러운 글씨가 인상적인데 철필로 써 내려간 것을 등사해 만든 것이었다. 전국에 수만, 수십만 명의 기자와 대학생, 지식인이 있었지만, 광주에서의 참상을 알지 못했던 혹은 알고 있어도 말 한마디 못하고 있던 1980년 6월이었다. _94쪽, 김종태
‘피 묻은 권력’에 굴복할 수 없어 싸웠고, 그 결과 법정에 서게 됐다는 유시민은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학생운동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라는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의 독백을 인용해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유시민이 「항소이유서」를 쓴 날인 5월 27일은 여러 의미에서 특별한 날이었다. …… 유시민에게 5월 27일은 5년 전, 계엄군에 맞선 광주 시민들이 전남도청에 장렬히 산화한 날이요, 인간 구원을 위해 부처님이 세상에 온 날임과 동시에 벗이요 동지인 김태훈 열사가 4년 전,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계단을 피로 적시며 숨져간 날이었다. _137~138쪽, 김태훈
중동에서 목돈을 손에 쥐었지만 홍기일의 마음은 1980년 총을 맞은 그날부터 내내 지옥이었다. 사실 중동에 간 것도 마음을 어지럽히는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서였다. 눈을 감아도 그때 그 장면이 떠올랐다. 혼자서 페인트칠을 하거나 인부들하고 밥을 먹거나 친구들하고 술을 한잔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군인들이 총칼을 들고 날뛰는 모습과 금남로의 시신들이 밤마다 꿈에 나타나 괴로웠다. 홍기일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희희낙락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였다._175쪽, 홍기일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학원에서는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곤 했는데, 송광영도 1982년 이 장학금을 받게 됐다. 당시 1만 5000원은 학생에게는 큰돈이었다. 학원비로 쓰든, 생활비에 보태든 했으면 좋으련만 송광영은 그 돈을 길에서 만난 일면식도 없는 구두닦이에게 줘버리고 만다. 어머니 이오순이 “집안 형편을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며 야단을 쳤다. 송광영은 “그래도 우리는 집이 있지만 그 아이는 집도 없이 가난하지 않습니까? 저는 좋은 성적을 얻었으니 그걸로 만족합니다”라고 말해 어머니 이오순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 송광영은 평화시장 청계노조 활동과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듣게 된 평화시장의 전태일 열사의 삶에 관심을 두게 됐다. 누군가 전태일의 분신을 두고 지나치게 극단적 방법이라고 비판하면 불합리에 대항한 참된 인간의 선택이라고 항변했다. 전태일의 죽음과 아울러 고향에서 들려온 홍기일의 분신 소식은 송광영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_229쪽, 송광영
1986년 3월 5일 경기도 안양시 박달동 예비군훈련장에는 늘 그랬듯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예비군 훈련 프로그램에 포함된 안보 강의가 전두환 대통령을 추어올리는 홍보의 장이 된 것이다. 교관의 눈을 피해 엎드려 잠을 자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깨어 있는 이들은 이 지루한 시간이 어서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강의장 한 편에서 화난 표정의 남성이 전두환을 찬양 중인 강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33살의 예비군 장이기였다.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벌떡 일어난 장이기는 강의실에 있던 전두환 대통령의 액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장이기는 떨어진 대통령 액자를 군홧발로 짓밟으며 소리쳤다. “광주 시민 학살한 전두환을 처단하자!”_251쪽, 장이기
어머니 고복단이 서울 고려병원에 도착한 것은 3월 7일 새벽 3시, 그러나 아들을 만날 수 없었다. 경찰은 가족의 면회도 허락하지 않았다. 고복단이 아들을 볼 수 있었던 건 10시간이 지난 뒤였다. 경찰은 병실 면회를 5분 동안만 허락했다. 표정두는 온몸이 숯덩이가 된 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온몸이 시커멓게 된 저 남자가 아들인지 아닌지 고복단은 알 수 없었다. 내 아들 정두가 맞느냐고 의사에게 반문할 정도였다. 그러다 병상 옆에 벗어둔 표정두의 가죽신을 보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오매 어쩌까.” 아들 정두가 용접할 때 불티가 튀어도 다치지 않으려고 신었던 그 가죽신이었다. 경찰은 오열하는 어머니를 끌어냈다. _279쪽, 표정두
고인(故人)이 된 다른 민주화운동 인사들과 비교했을 때 황보영국과 관련한 자료는 터무니없이 적고 부족하다. 일기나 메모는 행방이 묘연하고 시신은 화장됐다. 제대로 된 수사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생각으로 분신을 결심했는지는 주변 상황을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다. 대다수 국민들이 광주사태라 부르고 있었고 또 상당수 사람들은 간첩의 소행쯤으로 알고 있던 1987년, 26살 부산 청년은 어떻게 해서 광주학살의 진실을 알게 됐을까? …… 황보영국이 분신하기 한 달 전 부산 시민들은 난생처음 보는 잔인한 사진들을 보러 사진전시회에 몰리고 있었다. 천주교 부산 교구가 1987년 4월부터 6월까지 가톨릭센터에서 ‘5·18 광주의거 사진전’을 개최한 것이다. 5·18이 아직 ‘광주사태’일 때 충격적인 내용의 사진전이 열리는 것도 ‘사건’이었다. 제 나라 시민들을 향한 군인들의 무자비한 폭력과 살육, 계엄군이 쏜 총에 머리가 날아간 청년, 폐허가 된 광주 도심 ……. ‘5·18 광주의거 사진전’은 부산 시민들이 그때까지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던 7년 전 광주의 진실이었다. _308쪽, 황보영국
1987년 시민 항쟁이 헌법 개정을 이끌어냈지만, 또 광주학살의 책임자 전두환을 권좌에서 물러나게는 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니, 너무도 안타까운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전두환과 육사 동기인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6월항쟁 때 분출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노태우는 전두환과 더불어 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를 주동한 인물이다. 국민들이 직선제로 뽑은 대통령이 쿠데타를 주도한 군인 출신이라는 사실은 박래전에게 너무나도 참담한 것이었다. 고작 이런 결과를 보려고 그 고생을 하며 싸웠던 말인가. 1년 전 인파로 가득한 광장의 기억을 떠올릴 때 박래전은 감격에 겨워 가벼운 전율을 느꼈다. 그러나 투표 결과는 군부정권의 연장이었다. ‘헌법’을 바꿔 권력을 교체하면 1980년 광주학살의 책임자 전두환 일파를 처벌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도리어 전두환 일파를 권력자로 뽑고 만 것이다. _330쪽, 박래전
대학생도 아닌 노동자가 그것도 어떤 노동 단체에도 속하지 않았던 개인이 홀로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해서였을까. 그의 투쟁은 유난히 외롭고 쓸쓸했다. 김병구의 외롭고 쓸쓸하지만 높고 의로운 투쟁은 숨진 지 12년이 지난 2001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아직도 그가 왜 “광주학살 원흉 처단”을 외치게 됐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밝히고자 했던 대선과 총선의 부정 선거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고, 그가 수집했다는 자료 또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살아서도 외로웠던 투쟁은 죽어서도 쓸쓸하고 외로웠다. _380쪽, 김병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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