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삶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만큼 인기를 끌면서도 또 동시에 경시되어 온 주제는 별로 없다. 사람들이 이 주제에 관심을 두는 것은, 저들도 능력을 원하기 때문이다. 살면서 하나님의 세계, 인간의 통상적 경험을 벗어나는 세계를 경험하고 싶은데, 성령이 딱 그 길처럼 보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주’(主)라는 권위적 역할이 확립되어 있다. 하지만 성령님은 쉽게 조종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들 많이 오해한다. 성령님의 명칭이 위로자, 조력자, 상담자이다 보니 성령님이 계신 이유를 마치 우리의 종이 되어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해 주시는 것으로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하지만 그건 근본적으로 잘못된 시각이다. 예수께서 성령님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다. 그분의 통치와 권위를 우리 삶에 드러내시기 위해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 보면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빠질 때가 너무 많다. ‘거기서 내가 얻을 게 무엇인가, 성령 충만해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게 무엇인가’에 치중하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이고,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경험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성경을 보라. 성경에 분명한 가르침이 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 점을 놓치고 만다. 그러나 성령님에 대해 올바로 알아야 비로소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는 변화된 삶을 경험할 수 있다. --- pp. 7-8
이 땅에 육체로 사실 때 보이신 예수님의 능력의 근원을 결코 간과하지 말라. 많은 이들이 그분의 기적을 이런 말로 둘러대곤 한다. “그분께는 쉬운 일이지. 하나님이시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가운데 살기로 하셨을 때, 그분은 당연한 권리를 버리고 인간처럼 사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빌 2:6-7)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한계를 고스란히 지닌 채 살기로 하셨다. 우리와 같이 되시지 않고는 우리를 대신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구원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라는 한 인간에 달려 있었다. 그러므로 그분이 사신 삶은 우리가 살 수 있는 성령 충만한 삶의 좋은 예이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누가는 예수께서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행 1:2)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했다. 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께서 예수님의 삶에 역사하셨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 삶에는 항상 성령님이 함께하셔야 한다. 예수님도 그러셨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명령은 그들의 삶에 성령님이 임하시기를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성령님이 없이는 그들이 아버지의 뜻을 행할 수 없으나 성령님 안에서는 어떤 일도 가능함을 그분은 아셨다. 과연 그대로 되었다. 성령님이 임하시고부터 사도들은 예수님이 하시던 모든 일을 했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놀라운 권세와 능력으로 가르쳤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었다. 우리 삶과 사역도 그렇게 될 수 있다. 예수께 임하신 그 성령님이 바로 당신과 내게 오신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삶을 알면 큰 힘이 된다. 우리가 살면서 어떤 시험을 만나더라도 그분은 이해하시기 때문이다. 그분도 죄로 타락한 이 세상에서 인간의 몸으로 사셨다. 우리 모두와 같이 그분도 육체로 계실 때 많은 고생을 당하셨다. --- pp. 58-59
몇 년 전에 나(멜빈)는 아주 특이한 주말을 경험했다. 이상한 일은 토요일 아침에 내 휴대전화로 전화가 걸려올 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급한 사정이 생겼다며 월요일에 뉴욕에서 있을 중요한 목회자 집회에서 나더러 대신 강연을 맡아 달라고 했다. 마침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던 나는 그 통화 때문에 생각이 흐트러져 디젤유를 넣는 픽업트럭에 실수로 휘발유를 넣었다. 낭패였다. 바로 잘못을 알아차리고 근처 가게에 가서 기름통을 사 기름을 빼내느라 진땀을 뺐다.
이상한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주일 오전에 우리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고는 서둘러 공항으로 갔다. 시카고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 뉴욕으로 갈 예정이었다. 시카고에 도착해 호텔을 찾는 데 공항이 공사 중이어서 너무 오래 걸렸다. 결국 호텔에 갔을 때는 늦었고 피곤했고 배가 고팠다. 집회 참석이 막판에 결정된 일이라 강연 내용을 준비하지 못한 터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준비를 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성경책을 깜빡 잊고 두고 온 것을 그제야 알았다. 목회자 집회에 강사로 간다는 사람이 성경책도 없었다. 호텔 방의 기드온 성경책을 그냥 가져가고 기부를 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훔친 성경책으로 하는 설교를 하나님이 좋게 보실 것 같지 않았다.
이튿날 비행기 시간이 일렀으므로 일단 자기로 했다. 전기면도기도 깜빡 잊고 두고 온 것을 그때 알았다. 별일 아닌 것 같지만 전기면도기를 쓰는 사람은 내 문제를 안다. 내 피부는 호텔에서 무료로 주는 플라스틱 면도기에 잘 맞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내 얼굴은 면도날에 벤 곳 천지였고, 덕분에 얼굴에 화장지 조각들을 붙이고 호텔을 나섰다.
결국 뉴욕에 도착하여 목회자 집회에서 강연했다. 유엔 대사들을 위한 이튿날의 특별 오찬에도 참석할 수 있다는 사전 통보도 받았다. 그날 목회자 집회가 끝나는 대로 담당자가 나를 찾아올 거라고 했다. 과연 그가 와서 내게 말했다. “오늘밤 목사님 설교를 듣는 중에 주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유엔에서 목사님이 대사들에게 강연해야 한다고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강연 시간은 45분입니다. 이런 행사로 이렇게 많은 인원의 대사들이 모이기는 처음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회교국 출신도 많습니다. 목사님의 신앙과 성경에 대해 자유롭게 말씀하실 수 있으나 규정상 성경책은 읽지 못하게 돼 있습니다.”
성경책을 두고 왔으니 그거라면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유엔 대사들을 위한 강연을 준비하지 못한 건 당연했고, 일정상 준비할 시간도 없어 보였다. 그날 밤은 너무 녹초가 되어 그냥 잠이 들고 말았다.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전철로 그랜드 중앙역까지 가서 폭우 속을 걸어 유엔본부에서 멀지 않은 사무실 건물로 갔다. 모임에 가기 전에 준비할 시간이 한 시간 있었다. 보안검색 과정을 거쳐 유엔 건물에 들어가니 대사 전용 층에 가기 위한 보안검색을 또 했다. 고급 식당에 들어서니 현악사중주단이 연주하고 있었고, 곧바로 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맨 처음 만난 사람은 유엔 총장이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오찬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오전 내내 대테러 방책에 대해 회의했더니 이제 느긋하게 앉아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 좋겠는데요.”
그의 말을 듣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할 지 나도 궁금한걸!’
한 식탁에 여덟 명씩 앉아 점심을 먹었다. 나는 피곤했고 떨렸고 개밥에 도토리가 된 심정이었다. 나오는 음식을 보니 도통 뭔지 알 수 없었다. 어찌나 긴장되었던지 커다란 상추 잎을 내 무릎에 홱 떨어뜨렸다. 침착하고 냉정하고 태연해 보이려 했지만 속은 엉망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지? 어쩌자고 이걸 수락했던가? 내가 여기 있는 건 순전히 아버지가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내 안의 성령께서 웃음을 터뜨리신 것 같았다. 성령이 당신을 보고 웃으신 적이 있는가?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아직도 이 일의 관건이 너라고 생각하느냐? 면도도 제대로 못하는 너다. 너는 캐나다 소읍의 작은 교회에서 왔다. 이 자리에는 너를 아는 사람조차 없다.”
그분의 말씀이 이어졌다. “네가 유엔에서 말하는 이유는 순전히 내가 너를 여기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씀이 떠올랐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눅 12:11-12).
그날 아침, 우리 교회 교인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며 보내온 이메일도 생각났다. 곧 나는 깊은 평안을 경험했다. 일어나 강연을 하는데 마치 한 발짝 떨어져 서서 나 자신의 말을 듣는 것 같았다. 나중에 인도자가 하는 말이, 대사들이 어떤 강사에게 이렇게 빨려든 기억은 없다고 했다. 주님은 그날 그 대사들에게 하고 싶은 일이 있으셨고, 그것을 내 삶을 통해 하기로 하셨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같이 평범한 사람을 써서 그분의 뜻을 행하실 수 있다면 누구라도 쓰실 수 있음을 당신이 알았으면 해서다. --- pp.96-99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착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최선의 재능을 드리면 세상이 보고 경험하는 것은 그들의 최선일 뿐이지 세상에 주시려는 하나님의 최선은 아니다. 어차피 사람들은 우리의 재능에 별로 감동하지 않는다. 재능이라면 그들도 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비범한 일을 하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은 놀란다. 검사를 통해 자신의 성격을 알아낼 수 있다. 검사를 통해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할 수도 있다. 알면 매우 유익한 정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검사지로 알아낼 수 없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자주 곁길로 빠지는데, 이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내 힘으로 안 되는 일을 시키실 때 순종하는 쪽보다 그냥 내가 잘하는 일을 하는 쪽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순종하려면 그분의 뜻을 알 만큼 친밀한 관계, 그분의 뜻을 신뢰할 만큼 굳센 믿음, 그분의 뜻에 순응할 만큼 겸손한 마음이 필요하다.
쿇나님은 얼마든지 당신이 잘못하는 일을 시키실 수 있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 일도 자주 시키신다. 그러므로 당신의 적성과 취향대로만 그분을 섬기려 한다면, 그분이 당신의 삶에 행하시려는 일을 대부분 놓치고 만다. 그분은 당신의 능력을 쓰시지만 절대로 거기에 제한받지 않으신다.
흥미롭게도 나(헨리)는 여러 교회에서 중고등부 사역자, 음악 사역자, 교육 사역자, 담임목사로 섬겼고 또 성경대학 학장, 선교사, 집회 강사, 저자로도 섬겼다. 그렇다면 나의 영적 은사(선물)는 무엇인가? 성령님이시다. 그분이 내게 능력을 주셔서 여러 다양한 자리에서 주님을 섬기게 하셨고 그때마다 여러 다양한 능력을 주셨다. 성령께서 당신의 제한된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당신의 삶을 자유자재로 쓰실 수 있을 때 삶은 멋진 모험이 된다.
하나님이 내 삶을 통해 하시는 일을 둘러보며 놀랄 때가 많다. 그럴 때면 주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에 두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낀다. 캐나다 소읍의 숫기 없는 소년을 들어 세계적인 지도자들과 나란히 영향력 있는 자리에 두실 수 있는 분이라면 누구라도 쓰실 수 있다.
중요한 건 당신이 하나님께 가져다드리는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에게 가져다주시는 것들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순절의 선물을 주신 뒤로는 매일매일이 하나님 크기의 모험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타고난 재능과 과거의 경험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은 그것도 쓰실 것인가, 아니면 늘 우리를 천성적으로 약한 분야에서만 쓰실 것인가?
하나님은 당신을 지으실 때 독특한 재주를 주셨고, 그것을 쓰기 원하신다. 그러나 그분의 훨씬 큰 관심사는 당신이 당신의 능력을 아는 것보다 그분을 아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자아를 시인하라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아를 부인하라 하신다. 당신의 정체와 자존은 당신의 능력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다.
--- pp.118-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