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꽃잎 사이사이 인생유전 숨어 피더니
황국 홍국 지난 지금 꽃대에 자주 쥐가 난다
그리운 누님이라 불러준들 피워올릴 향기나 남았는지
이제사 랑송의 불문학사를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가지를 읽고 있지만
그 전율로 피 뜨거워져 흰 꽃송이 보오얗게 피어난들
탈을 쓴 것 같다고 웃지나 않을는지
장미 목련 라일락 진달래…… 수런수런
수없이 피었다 지는 봄 꽃밭 저 꽃들 속으로
건너갈 수 없는 가을 꽃 국화 한 송이
해 바뀔 적마다 저, 저쪽으로 고개 숙이는 누님꽃, 국화 한 송이
슬퍼도 비극을 노래할 줄 모르던
흔들려도 풍파를 건너뛸 줄 모르던 시절
내 속에 숨어 있는 내 얼굴을 나보다 더 잘 아는
꽃 한 송이 내 속으로 들어와
나, 제쳐두고 불러야 할 노래부르게 하더니
--- p.25
삼경에 미애와 나는
전나무 숲에서 취산의 대금 소리를 듣느다.
삼십 년이 흘렀어도 아직 맘에 맞는 소리를
못 낸다는 취산 그리고
살금살금 천왕문을 빠져나와
반딧불이라도 눈붙여서
숨어 있는 진리 좇고 있는 또 한 사람
못난 사람끼리의 그릇 깨지는 소리만 들려준다.
세상 공부 비웃지 마라
세상 공부 배불러야 사바세계도 서방정토도 기웃거리는 법
절은 있어도 스님은 없는데
무심해지고 싶어 실비 타고 왔는데
산에도 그리움이 있어
산 그리움과 내 그리움이 대금 소리에 엉켜 밀고 당긴다.
억억, 말이 되지 못한 소리로
문장이 될 수 없는 형태로 숲을 떠돌다가
숲의 정령이 되어
또르륵또르륵 숲을 흔든다.
소리가 되고 문장이 되어 퍼진다.
현실 해탈도 다음 생도 두려운 전나무들은
내가 피운 한 개비 담배 연기처럼
없을 無만, 없을 無만
공중 가득히 퍼져나가게 한다
--- p.72
내 작은 심연에는
은조기 한 떼가 꽁꽁, 무더기 무더기
얼은 채로 살고 있다
우리네 사는 일 아무리 쓸쓸해도
그리운 사람에게 마음 한 조각 전하고 싶은 날
햇살 넘쳐흐르는 소쿠리 옆에 서서 모믈 녹인다
빨갛게 달구어진 얼굴로 문지방을 들어서면
방바닥 가득 풀려나오는 은조기떼
오늘은 그 중의 한 마리가
눈 오는 나르이 삽살개처럼 지느러미 흔들더니
고운 노랑나비 되어 폴짝
외로운 내 창틀에 앉아
식구처럼 앉아
턱을 고인다
--- p.42
나,
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면
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
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처럼
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
나 아직도 갈 곳이 있고 가서 씨뿌릴 여유가 있어
튀어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 있어
나 이 길을 따라 쭉욱 가서
이 길의 첫무늬가 보일락말락한
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
아직은 낯이 설어
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
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그 집의 뒤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
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
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
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
그 마음 둥글게 말아 둥그런 얼굴 하나 빚겠네
그 건너편에 물론 강물이 흐르네.
그 강물 속 깊고 깊은 곳에 내 말 한마디
이 집에 세들어 사는 동안만이라도
나… 처음… 사랑할… 때… 처럼… 그렇게…
내 말은 말이 되지 못하고 흘러가버리면
내가 내 몸을 폭풍처럼 흔들면서
내가 나를 가루처럼 흩어지게 하면서
나, 그 한마디 말이 되어보겠네
--- p.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