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벼락 아래에는 채송화나 봉숭아 같은 꽃들이 피어 있고 전봇대 옆에는 아무도 탐내지 않을 법한 ‘쌀집 자전거’가 우두커니 서 있다. 5,000원이면 어떤 옷이든 수선해주는 세탁소, 약탕기 하나 갖춰놓고 무엇이든 달여줄 것만 같은 가게, 커다란 유리병에 주인이 직접 담근 마늘장아찌를 파는 반찬가게, 아무도 입지 않을 것 같은 재즈댄스 의상을 파는 가게 등 장사가 될까 의심스러운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이 동네는 나무가 많고, 시장이 있고, 걷기 좋은 산책로가 있다. 담벼락에는 담쟁이가 엉켜 있으며 너무 부잣집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기가 죽지도, 너무 가난해서 인심이 팍팍하지도 않은 곳이다. 사람들은 천천히 걷고, 자기 집 앞은 자기가 쓸고, 소문에 적당히 민감하지만 소란스럽지 않다. 철마다 벚꽃과 개나리, 장미, 코스모스가 핀다. 모양내어 손질한 정원보다는 귀엽고 아기자기한 화분이나 화초를 베란다에 내놓는 것을 좋아한다. --- 「내가 살고 싶은 동네」 중에서
여행의 설렘은 공항에서부터 시작된다. 인천국제공항 3층에 있는 출국장의 문이 열리는 순간 다른 세계에 도달한 것 같은 설렘이 시작된다. 공항 입구에 있는 출발시간과 도착지가 뜨는 전광판만 보아도 가슴이 떨린다. 바쁜 와중에 떠밀리듯 가는 출장이라도 공항에 도착한 순간, 안도감이 든다. 쉴 새 없이 울려대는 휴대폰, 마감 압박에서 당분간은 해방이라는 생각과 함께. 비행기가 하늘에 떠 있는 몇 시간만큼은 완벽히 내 시간 같다. --- 「떠나지 않아도 행복해」 중에서
해외에 가면 벼룩시장 쇼핑은 빼놓을 수 없는 재미 중 하나다. 파리 페르라셰즈 벼룩시장에서 사온 반지와 빈티지 찻잔, 런던 노팅힐에서 사온 회중시게와 인조가죽 점퍼,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사온 고양이 그림 등 수십 년의 역사와 시간이 담겨 있는 물건이 흐르고 흘러 나에게 왔다는 것이 때로 기특하다. 누군가와 시간을 건너뛰어 연결된다는 것 역시 낭만이 담겨 있는 것 같아 보고 있으면 쓰다듬어 주고 싶다. 그게 바로 빈티지의 묘미가 아닐까.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가 무거운 손으로 돌아오는 여행길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역시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방 안에 있는 것들을 보며 그 도시의 추억을 환기하는 것만으로도 내 여행 전리품들은 제 역할을 다한 것이다. --- 「여행보다 여행 기념품」 중에서
우아함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여성스러운 우아함도 있고 똑똑해 보이는 우아함도 있다. 서양 사람들은 우아함의 조건으로 ‘serenity’라는 단어를 꼽는다. 평온함, 침착함, 온화함이란 의미를 지닌 단어다. 우아하기 위해선 쉽게 흥분하거나 부화뇌동하면 안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저 부드럽기만 하다고 되는 건 아니다. 우아하기 위해선 내적인 힘이 동반되어야 한다. 30대 중반을 넘고 나니 우아함이 여자에게, 아니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 새삼 느낀다. --- 「우아함 그 아름다움」 중에서
누군가와 함께했던 저녁식사 시간은 식탁에 올린 메뉴보다 음식을 담았던 그릇들로 기억되곤 했다. 그의 생일에 끓여준 미역국을 담았던 하얀 국그릇, 친구들을 초대해 만든 굴 소스 마늘 파스타를 담았던 프로방스 풍 접시,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면 사랑에 빠진 여자처럼 후끈 달아올랐던 그라탱 접시. 티타임을 기다리는 시간이 즐거웠던 이유는 찻잔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레이스 무늬 접시에 담은 쿠키 때문이었다. 아기자기하고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패턴을 가진 그릇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면 퍽퍽한 현실이 살짝 잊혔다. 두부 반찬도 웨지우드 그릇에 담으면 고급 레스토랑에서 파는 음식 못지않았다. 정성스럽게 차린 식탁을 마주하고 생각했다. ‘오늘도 행복한 것 같아.’ --- 「그릇에 관한 로망」 중에서
그 사람이 읽는 책을 보면 그가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나 역시 다른 누군가의 집에 처음 가면 그 사람의 서재를 유심히 보게 된다. 그들이 읽어온 책은 그들이 살아온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다. 때로는 그 시절 내가 읽었던 책을 누군가가 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친구가 된 것 같은 동지의식을 느낀다. 만약 같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연애하기 좋은 상태라면 삶의 동반자를 택할 때는 그가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또 좋아하는지를 보고 선택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독서 목록과 취향은 이성과 감성의 영역을 두루 넘나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 「서재 결혼시키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