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잠자리에서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제1회 세계짜장면경진대회’가 열리는 꿈이었다. 장소는 인천 차이나타운. 세계 도처에 한국인이 모여 사는 곳이면 있기 마련인 짜장면 집에서 대표선수들을 내보냈고, 거기에 더하여 본토인 중국에서도 출전했는데 중국 쪽 대표에는 쯔보에서 본 그 친구가 끼어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그 친구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라오베이징자장몐의 그 ‘라오’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라네. 한국 사람도 짜장면에는 오랜 정이 들었거든. 짜장면이 한국의 100대 문화 상징에 선정되었어요. 그뿐 아니네. 몇 년 뒤에는 이곳 인천에 짜장면박물관이 들어선다네. 어때, 이만하면 우리도 ‘한짜장면’ 하지?”--- 「내가 제일 맛있게 먹은 짜장면」
최근에 완성된 인천의 대역사(大役事) 인천대교는 인천의 랜드마크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다리보다 더 큰 다리가 인천에 있다. 그것은 화교라는 다리다.
화교라는 존재가 바다 양쪽을 잇는 교량의 몫을 하는데 짜장면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짜장면은 원래 산둥의 옌타이 인근 자오둥(膠東)요리로부터 나왔지만, 한반도로 건너와서 한반도화되었다. 그 아이덴티티로 치자면 중국적인 것+한국적인 것=짜장면이 된 것이다. 이런 걸 두고 혼성, 곧 하이브리드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런 하이브리드야말로 21세기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20세기 화교(華僑)에서 21세기 화교(華橋)로」
우리 짜장면의 직계 조상인 푸산(福山)요리가 흥성하게 된 데에는 개항이 주요한 몫을 담당한다. 옌타이의 개항은 1861년으로 인천보다 20여 년 앞선다. 제물포가 한낱 어촌이었을 무렵 옌타이에는 십여 개국의 영사관, 우체국, 은행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양인들은 중국인 요리사들의 요리에 매료되었으며, 거기서 자연스럽게 요릿집들이 생겨나면서 개항 특수를 맞는다. 인천의 사정과 다르지 않은, 다시 말해 인천의 거울이 옌타이기도 한 것이다. 인천에서 돈놀이를 하던 중국인 방판 우리탕(吳禮堂)이 인천의 외교구락부에서 그의 서양인 아내와 추던 탱고는 이미 옌타이에서 유행했던 춤이었다. 그 무렵 옌타이와 인천을 이어서 보지 않으면 짜장면의 비밀은 밝혀지지 않는다.--- 「짜장면의 거대한 뿌리」
“말두 말아요”는 그(손덕준 인천화교협회 부회장)가 말끝마다 붙이는 어구 비슷한데, 필시 그가 말도 못 할 정도로 고생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연년생 또는 두 살 터울로 8남매의 맏이에, 아버지는 8년을 자리보전을 한 채 고향에 가고 싶다는 타령을 하시다가 끝내 고향땅을 다시는 밟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말두 말아요”가 그의 입에 밸 만하지 않은가. 그리고 몇 년 전 조카 결혼식에는 인천에서 모친을 모시고 아이들과 같이 숭갸탄에 왔단다. 그때도 또 눈물바다였으리. 황해 바다가 만일 짜다면 그건 필시 고향을 밟지 못한 이들의 눈물도 한몫을 했을 테다.--- 「다시 찾은 아버지의 고향, 숭갸탄」
그렇다. 중국에서 길거리를 걷다가 출출하면 사 먹는 저 젠빙(煎餠)도 우리 짜장면과 무관하지 않은 음식이다. 둥그런 쇠판에 묽은 밀가루 반죽을 둥글고 얇게 깐 다음 달걀을 한 개 깨서 얹고 거기에 뿌리는 것이 한국 사람들이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샹차이(香菜)까지는 좋은데 거기에 또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송송 썬 파닫. 그리고 거기에 다시 춘장을 붓으로 찍어 바른다. 그다음 파삭하게 튀긴 밀가루 튀김을 얹은 다음 둘둘 말아 주면 그게 젠빙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밀가루와 파와 춘장의 결합이다. 이 젠빙도 그러고 보면 짜장면의 친척인 셈이다. 중요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짜장면은 마냥 짜장면이 아니라 그 친척, 사촌들이 존재하는 것.--- 「짜장면에도 친척이 있다」
대파는 느끼한 맛을 강한 매운 맛으로 중화시키는 몫을 하는 채소다. 추운 날씨→독한 술→기름진 안주로 이어지는 음식 코드에 슬며시 얹어진 것이 바로 대파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파를 날로 먹으면 매운 맛이 있으므로 그것을 춘장에 찍는 것. 앞서의 대화에서 음식점 주인이 아내에게 대파와 함께 춘장을 가져오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산둥요리의 한 코드가 완성된다. 추운 날씨→독주→기름진 안주의 느끼함→대파의 자극성→춘장으로 연결되는 선이 그것이다. 이 대파가 한국에 와서 짜장면에 얹히면서 양파로 바뀌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 「춘장과 대파의 비밀」
마구 비빈 짜장면이 이윽고 입으로 넘어간다. 이때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한국 짜장면과 어디가 어떻게 다른가. 숙주와 오이 그리고 샹차이 따위 채소의 맛이 우리네 짜장면과 다른 것은 그렇다 치고, 뭐니 뭐니 해도 맛을 짚어야 하는 것은 볶은 짜장의 맛이다. 면과 어우러진 첫 입에 혀로 감겨 온 맛은 물로 한국 짜장면과 다르다고 속으로 뇌까리려는데 어딘지 같은 맛이 혀의 미각 세포를 자극하는 게다. 이런 경우를 두고 대동소이(大同小異)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소동대이(小同大異)라고 해야 하나 하는 물음을 스스로 던지면서 다시 한 젓가락.--- 「베이징의 본바닥 짜장면 맛 기행」
악(樂)은 또 뭔가. 악에도 증빙이 없을 수 없다. 무단통치의 대명사인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자 전국의 무기를 거두어 만든 것이 함양성 밖에 세울 구리종[銅鐘]을 지키는 동인(銅人)이었다. 솥과 구리종이 합쳐지면 무엇이 되는가. 먹고 마시면서 음악 반주를 곁들이는 그림이 연출된다. 무기를 녹여 종과 솥으로 만듦으로써 중국은 무(武)를 방치하고 결국은 문약(文弱)으로 흐르면서 ‘동아병부(東亞病夫, 동아시아의 병든 사내)’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21세기 중국은 그 솥을 다시 세웠다. 문(文)의 시대를 맞았다는 시대 감각, 곧 무로 이 세상을 태평하게 다스린다는 강령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제나라와 강태공의 생선 요리」
우동이 자신의 원적(原籍)을 일본이라 하고, 짬뽕이 자신의 본적을 나가사키라고 하면서 아우성을 친다. 냉면도 조상이 한국이라고 하면서 볼멘소리를 한다. 자신들을 왜 중국음식점 식탁에 올려놓았느냐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국적, 본적, 조상을 따지기만 하면 그건 20세기식이다. 우동은 본디 중국의 원툰(??)이 일본으로 건너가 우동이 되었다. 그 일본식 우동이 중국으로 다시 건너가면서 우둥(烏冬)이 되기도 했다. 이주(localization)와 재이주(relocalization)를 겪으면서 우동의 재료나 맛도 달라졌다. 국경을 넘나들면서, 유식한 말로 하이브리드, 한자어로는 혼종(混種), 식탁에 올려진 메뉴의 이름으로 거론하자면 ‘짬뽕’이 된 것이다. 우리가 중국음식점에서 먹는 국수 종류야말로 이른바 다문화(multuculture) 현상의 표징이다.
마지막으로 부탁을 드리는 것은 짜장면을 드시되, ‘화교’라는 존재를 한번쯤 떠올리면서 검은 국수를 목으로 넘겨 보시라는 것이다. 한번쯤 목이 메어 화교에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이른바 ‘톨레랑스’를 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일본인들의 재일동포 차별에 대해 낯을 들고 이야기를 할 자격을 갖출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런 자격이야말로 모름지기, 21세기에 우리가 갖추어야 할 ‘국격(國格)’의 하나일 테니까.
---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