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빛과 비잔틴의 황혼을 지나면 어둠에 도달하게 된다. 화려한 제국의 도시도, 돈을 물 쓰듯 하는 국경의 군대도 없이 다만 현실적인 상호주관성 안에 녹아드는 추상적인 사회 질서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암흑은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회나 문화의 문제라기보다는 상태의 문제다. 정치적 부문 아래에 있는 하위 제도들-왕족, 수도원, 진지, 장원-은 시칠리, 에스파냐, 서지중해의 여러 지역을 빼앗긴 기독교 라틴 국가를 허망되이 지향한 것이 아니라 아일랜드와 서독으로 팽창해 나갔다. 소금사에서는 이를 "영지의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대에 건설적인 성취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인상적인 것은 아니었어도 후대의 건설에 기초가 되었다.
서유럽 | 중요한 혁신들 | 생산
로마 시대에 별로 변하지 않았던 켈트 사회의 소금 산업 형태가 암흑 시대 동안에는 상당할 정도로 변화했다. 로마와 랑그도크에서도 중요한 혁신이 있었다.
농도가 낮은 바닷물을 이용하는 북부와 서부 해안의 소금 산업에는 두 가지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변화로 인해 예전의 브리크타주 기술이 쓰이지 않게 됨으로써 이후부터 이 기술은 가벨이 시행되는 카르 뷔용 지역인 노르망디에서 제한적으로 이용되었다. 우선 영국 해얀의 바닷물은 염도가 높은 대륙의 염천과 암염갱으로 인해 중요성이 감소되었다. 토지대장은 해안 염전이 여전히 링컨셔에 34곳, 예식스에 21곳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 염전들의 중요성은 단지 지역적인 선에 그치고 있는 것 같다. 반면 로마 시대에는 개발의 증거를 찾기 힘들었던 내륙의 염전이 이제는 지역적인, 심지어 국가적인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우스터셔에는 염전이 최소한 3백 군데가 넘었다. 염전들은 생산량이 제각각 다양했지만 평균 550리터, 즉 4톤 가량의 소금을 생산했는데, 모두 합하면 총 생산량이 1,200톤에 달했다. 이것은 25만 명에서 50만 명에세 충분히 공급할 수 있는 양이었다. 드로이트위치는 정복자에게 연간 소금 약 34킬로그램의 가치가 있었다. 체셔의 낸트위치, 미들위치, 노스위치는 모두 약 17킬로그램의 가치가 있었으므로 이곳의 총 생산량은 5백 톤에 달했을 것이다. 우스터셔와 체셔에서는 소금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생산했는데, 납가마에서 나무를 때어 소금을 만든 이 방법은 또 다른 혁신이었다. 우스터셔의 소금 산업은 우스터셔 교회를 승인한 머시아(잉글랜드 중부의 옛 왕국)의 왕 애설볼드(재위 716~717년)의 헌장에 처음으로 언급되는데 여기에는 "강 남쪽 샐워프에서 소금을 생산할 수 있도록 건물 세 채와 노 여섯 개를 만들도록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우스터셔가 암흑 시대에 영향력이 컸던 수사들의 고향이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0세기의 성 오스월드와 11세기의 성 울프스턴이 이곳 태생이었고, 1066년 이후에는 휫비, 더럼, 세인트 메리즈, 요크 수복의 전초 기지였다.
--- pp.132- 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