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자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나는 한 번도 숨긴 적이 없소." 1977년 칸느 영화제에서 열다섯 살의 나스타샤 킨스키를 옆에 끼고 돌아다니는 그를 쫓아다니며 질문 공세를 펼치는 기자들에게 로만 폴란스키는 이렇게 외쳤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아주 어린 소녀들이 좋아요."
할리우드의 귀여운 어린 소녀들의 노화 과정과 용도 폐기 시기가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는 모양새가 흡사 개들이(비치들이) 나이를 먹는 꼴과 닮아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폴란스키를 두고 우유만 먹고 자란 송아지 고기를 보며 침을 질질 흘리는 놈이라고 말한다 해도 그렇게 심한 욕은 아닐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처녀 희생양(사실상 지긋지긋한 마누라로부터의 탈출구에 다름 아닌)에 대한 우리의 문화적 집착은 참으로 유별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과잉 성애화 된 시대에는 섹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 아기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도 모르는 소녀들만이 남자의 지배 욕구를 확실히 충족시켜 주고, 찢고 삽입하는 짜릿한 경험을 안겨 줄 수 있다. 데이트 강간, 유혹과 성희롱이라는 혼란스럽고도 애매한 성애의 회색 지대가 우리 삶의 영역에 자리 잡게 된 이후로는 실패의 여지 없는 폭행, 즉 어린아이나 혼수 상태에 빠진 환자, 정신 박약 여성에 대한 강간이 이전보다 훨씬 근사하고 안전한 것으로 되었다. 이들에 대한 폭행이 확실한 안도감을 제공하는 것은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닥친 위험을 표현하거나, 자신의 의지력을 행사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그년 같은 물건을 다시 만나기란 쉽지 않을걸." 1976년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포주는 꼬마 창녀 아이리스 (조디 포스터는 이 역할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년하고는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그러나 아이리스의 매력은 그녀가 들고양이처럼 쓰레기통을 뒤지고 살면서 터득했던 지혜로움에 있었다. 비록 열두 살이었지만 실제는 더 어른스러웠다. 우리의 환상에 불을 지르는 것은 아직 아무도 안 건드렸고 아무도 집적거리지 않았다는 바로 그 점이리라.
--- pp. 182∼183
영계 아가씨, 아빠 집에 계셔?
에이미 피셔가 기삿거리가 된 것은 이 사건에 여고생, 섹스, 폭력 등 온갖 자극적인 요소들이 한데 뒤엉켜 있었기 때문인 동시에, 이 사건이 모든 것을 비논리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섹스와 폭력을 그것이 갖고 있던 원래의 의미에서 떼어 내면서, 청소년기에 일반적으로 주어진 삶의 궤적을 거부하고 있는 하나의 사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에이미 피셔는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영화에서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건물들이 갑자기 무너져 내리고, 다리가 불타 버리는 이상한 결말 장면(적들은 이미 다른 공중 전투나 무기 창고에서 전멸되어 버렸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지니 말이다.)을 온몸으로 인격화해서 보여 준 셈이다. 물론 관객들이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이런 재난을 이야기 전개의 논리를 무시한 채 볼 수 있는 것은 그 특수 효과가 그럴 듯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에이미 피셔 이야기는 한 소녀에 대한 특수 효과에만 초점을 맞추려는 시도의 일환이었으며, 그 사건 이전에는 아무런 얘기도 없다는 것을 가정해놓고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이 떠돌고 있다.
그러는 동안 언론에서는, 맥베드가 자신의 잘못된 범죄에 대해 변명했던 것처럼 "우리는 뱀을 못살게 굴고 바싹 말려 버리기는 했지만 죽이지는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건 이후 자신에게 질문이 들어올 때마다 에이미는 몇 번이고 조이가 자신에게 그의 부인 메리 조 버타푸코를 죽여달라고 부탁해 왔다고 주장했지만 메리 조의 부상이 그녀의 남편과 모종의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언제나 부정되어 왔다.
결국 에이미 혼자만 기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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