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서로 어긋남의 상처를 가지고 마주보며 산다. 상처는 절실하게 맞물려가면서 새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진실한 랑이란 상처의 어긋남을 끌어안고 수용하여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사랑은 부딪치는 상처를 받아들이고 헤쳐 나가고 서로가 생명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가꾸어 가며 산다. 그 삶은 잔잔하고 활기 있는 생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그 상처로부터 자유해진다. 생명은 상처를 안고 태어나 상처를 받고 그로 인해 생명의 가치를 승화시킨 삶을 산다. 우리의 생의 여정에서 겪는 모든 상처가 멘토인 것이다. 멘토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상처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 ---p.20,「상처로 생명을 열다」
유전자들이 몸 밖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하여 어떻게 염색되어 가는지 인간은 알 수 없다. 단백질의 변형은 몇 조「兆)분의 일초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모른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유전자는 결코 틀에 박힌 행동을 하지 않는다. 변화의 과정 속에서 유전자는 ‘내가 나도 모르기에’ 상처를 받으며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생명의 가치를 아는 것이다. ‘상처를 극복한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변화가 없다면 삶의 변화가 없을 것이고 상처가 없다면 새로운 생명의 가치도 알 수 없다. 유전자의 변형은 상처에 적응하기 위해 상처를 이겨낸 삶의 모습이다. ---p.47, 「유전자의 변형은 상처에 적응한 모습이다. p47)
상처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 자연과 문명 사이에 빚어진 상처를 마주보며 자연스럽게 살기 위해 예술이 태어난다. 예술은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인간의 상처 속에서 태어난다. 예술은 상처를 안고 태어난 생명의 보석이다. ---p.61,「예술은 상처의 보석이다.」
윤정의 해체심리학의 심리 구조는 실재계의 모든 세계―자연「自然)·인위「人爲)―는 상처를 가지고 유기적인 질서와 기능이 연결되어 있는 존재다. 상처가 생명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은 그 상처가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하며 삶을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해체심리학은 실재계「상처:생명체)→상징계「거짓자아:관습·문화·제도)→해체계「참자아:無의 세계) 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순환구조를 가지고 있다. 해체심리학에서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지닌 조력자인 멘토「Mentor)는 자신의 상처에 있다고 본다. 악연도 필연도, 선도 악도 아닌 단지 상처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멘토인 것이다. ---p. p73,「윤정의 해체심리학의 심리 구조」
이 세상의 모든 물질과 생명들은 각기 존재하며 서로 부딪치며 함께 살아간다. “티끌도 부딪쳐야 생명이 된다.” 원소는 다른 원소를 만나 어긋날 수밖에 없지만 맞물려가면서 하나가 되고자 하는 고통의 상처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인다. 상처는 어긋나지만 맞물려가는 과정에서 서로 고통을 주고받으면서 생명이 된다. 모든 물질과 생명은 상처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 사랑은 끊임없이 서로 어긋난 상처에 어울리며 살아왔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의 모습은 상처로 엮어진 존재이다. 인간의 존재도 역시 상처의 결과물이다. 사랑이라는 것도 서로의 상처를 받아들인 하나가 된 생명의 가치를 깨닫는 것이다. ---p.75, 「“존재를 가치를 깨닫게 하다”의 全부분」
오늘날 넘쳐나는 정보와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진정한 내가 아닌 가면 속의 나로 살아가며 가면의 나를 나인 줄 착각하며 살고 있다. 나자신의 존재 가치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물질과 명예, 성공과 학벌로 인정받는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 있다고 의식한다면 진실된 자신을 만날 수 없을 것이며 진정한 생명의 가치도 모를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생 문제의 대부분은 어릴 때 부모나 성장 환경에서 받은 의식의 상처에 그 감정의 뿌리를 두고 있다. 부모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닌 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어린 아이는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 자연스러운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게 되면서 부모를 이상화하거나 우상화하게 된다. ---p.102, 「의식의 대물림」
인간 사회는 “원시적인 자연상태에서 도시적인 인위적 구조를 만들어 세련되어 갈 때 인간이 타락한다.”고 루소는 말한다. 그는 타락의 정서적 기저에는 인간의 타고난 이기주의가 갖는 허영과 자만심, 그리고 파괴적 본능으로 타인을 억압한다고 했다. 이기주의는 탐욕스러우며 타인을 경쟁자로 보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과 멀어질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도 멀어진다. 철학자 칸트는 루소를 ‘비할 데 없이 완벽한 영혼의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라고 했다. ---p.144, 「상처의 멘토를 만나다. 루소」
베토벤에게 사랑의 상처는 위대한 멘토였다. 그는 사랑의 힘으로 많은 곡들을 만들었다. 작곡하면서 그는 그의 상처를 이기는 힘이 생겼고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사랑의 상처로 우주를 품고 환희를 노래하는 위대한 음악가로 남았다. ---p.165,「상처의 멘토를 만나다. 베토벤」
우리는 너무 많이 생각하는데 반해 느낌은 너무나 적다. 기술보다 더 시급한 것은 인간성이다. 우리에게는 선함과 온유함이 날카로운 이성보다 더 중요하다. 이런 특성들을 잃어버릴 때, 삶은 더욱 더 폭력적이고 인간은 더욱 더 상실감을 가지게 된다.” ---p,174, 「상처의 멘토를 만나다. 채플린」
그녀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두려워하던 실패라는 상처가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실패의 상처를 가졌지만 나는 살아 있었고, 사랑하는 딸이 있고, 낡은 타자기와 아이디어가 있었지요. 실패와 상처는 가장 밑바닥에서 인생을 세울 수 있는 단단한 기반이 되어 준 것입니다. 내려갈 때까지 내려가면 두려울 것도, 꺼릴 것도 없는 법입니다. 다시 일어나서 나아갈 일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조앤 롤링이 상처와 고통이 있을 때마다 가슴에 담아 있던 삶의 고백이며 철학이었다. 상처와 고통이 그녀에게는 삶을 일으켜 세워준 든든한 멘토였다. ---p.191, 「상처의 멘토를 만나다, 조앤 롤링」
배신의 상처와 죽음의 상처를 절제하고 인내하며 살아온 고통의 상처가 그녀에게 인생의 소중한 것을 깨닫게 한 것이다. 그녀는 상처를 모두 안고 걸어가면서 미래의 변화된 삶을 위해 한 줌, 한 점을 영원히 남기는 삶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멘토는 고통을 껍질로 감고 도전과 희망 속에 파묻혀 기다리고 있다. 시련과 도전은 상처인 멘토를 만나게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비극적인 상처를 이겨낸 삶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상처가 그녀의 진정한 멘토였던 것이다. ---p.214, 「상처의 멘토를 만나다. 박근혜 대통령」
부르디외는 각 개인이나 조직이 속한 ‘장「場)’마다 ‘기구화의 기계화’로 만들기 때문에 분노와 상실이 있어진다고 우려한다. 기구라는 개념은 가장 위험한 기능주의적 시스템의 방식으로 주어진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기획하고 계획된 기계와도 같은 것이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성은 시스템의 기능을 가진 기계적 유령에 지배되는 이성적 구조이다. 이런 구조는 ‘상실’이라는 소리 없는 상처가 되고 느낌 없는 인간을 만들어 내게 된다. ---p.231, 「상처의 흔적을 찾아간 사람들, 브루디외」
데리다는 정형화된 로고스적인 사고를 해체하고 이항 대립적 체계의 삶 속에서 상처를 가지고 서로 상처를 받으며 상처로 살아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인간은 이미 이항적 대립의 상황으로 인해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 상처를 극복하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기록은 상처로 길을 낸 흔적이며 역사이다. ‘해체’는 멘토가 걸어오고 걸어가는 역사의 시작이었고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다. ---p.241「상처의 흔적을 찾아간 사람들, 데리다」
프로이트와 카를 융의 심리구조
프로이트와 카를 융 시대의 심리적 구조는 명령과 금지로 이루어진 억압적 형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자아는 불안의 연속성 속에서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불안과 분노 사이에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획일적 규율사회의 순환구조가 있다. 의식은 전의식「개인적 무의식)과, 무의식「집단적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기에 자신이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기 자신을 인정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이런 경우 사회에 나가서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며 가면「Persona)을 쓰고 그 속에 열등감을 숨기게 된다. 그 결과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의 가치를 바로 알지 못하며 상처를 안고 상처에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는 악순환의 구조를 가지게 된다.
라캉의 주체적 욕망의 심리구조
라캉의 자아의 주체적 욕망이란? 환상이라는 거울단계의 상상계 속에서 불완전한 의미를 지닌 언어의 결여가 상실한 상징계 속에서 고통을 가진다. 그 고통 뒤에 성취한 욕망은 실재계의 몸에서 쾌락을 느낀다. 쾌락적 욕망은 완전할 수 없어서 공허한 결핍을 갖게 된다. 주체적 욕망은 또 다시 결여된 존재임을 깨닫고 욕망을 꿈꾸는 자기 충족적 구조를 지속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존재하며 산다. 욕망의 원인이 되는 결여는 단순한 없음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조건이다. 라캉은 욕망은 ‘결여 위에 모든 곳이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체적 욕망을 가진 인간은 고통과 쾌락 사이에서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존재적 가치를 느끼며 산다.
성과가 요구되는 오늘날의 사회 구조 속에서는 성과를 내며 자신의 결핍된 욕망을 채우고자 진정한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실재와 환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자기애성 성격장애 「사이코패스·과대망상·과잉행동장애)가 늘어나고 있다.
윤정의 해체심리학의 심리구조
윤정의 해체심리학의 심리 구조는 실재계의 모든 세계―자연「自然)·인위「人爲)―는 상처를 가지고 유기적인 질서와 기능이 연결되어 있는 존재다. 상처가 생명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은 그 상처가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하며 삶을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상징계란, 언어와 관습, 문화와 제도 속에서 상실과 분노를 가진 우울과 불안이 거부로 포장된 성형의식이다. 상처와 거짓자아 사이에 우울과 불안의 정서가 내재되어 있지만 참자아를 찾으면 그 삶은 생명의 가치를 누리는 것이다. 실재계와 상징계 사이에는 고통스러워도 소통해야 하는 생명 가치의 질서가 있다. 해체계인 참자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멸의 장「場)에 있는 하나 된 정서이다. 실재계는 서로 다른 기능을 유기적으로 연결된 질서를 가진 하나의 생명체로 존재한다. 상처를 가진 해체심리학의 세계에 있어서, 실재계는 물질적인 우연의 세계이고 현상계이다. 또한 상징계는 정신적인 논리의 세계이고 유한계「有限界)라서 결핍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체계는 실재계와 상징계의 소통으로 해체된 상처와 거짓자아가 소멸된 존재의 세계이기에 자유로운 무한한 정서가 있다. 해체심리학은 실재계「상처:생명체)→상징계「거짓자아:관습·문화·제도)→해체계「참자아:無의 세계)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순환구조를 가지고 있다. 해체심리학에서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지닌 조력자인 멘토「Mentor)는 자신의 상처에 있다고 본다. 악연도 필연도, 선도 악도 아닌 단지 상처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멘토인 것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