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열정은 대답이 아닌 물음을 향했다. 자신이 묻고 탐구한 것, 이를 그는 존재라 불렀다. 철학과 함께한 일평생 동안 그는 이 ‘한 가지’ 물음, 존재에 대한 물음을 되풀이해 제기했다. 그 물음의 의미란 모던 세계에서 소멸할 위기에 처한 신비를 삶에 되돌려 주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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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선택했을 때 자신의 생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그런 물음을 제기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물음을 연출한다. 그는 순전한 불명료성과 의문성의 눈보라를 불게 하려 한다. 이 눈보라는 아무리 우리가 상황을 투명하게 만들려 해도 상황 자체가 원래 불명료하고 애매한 것임을 밝혀 줄 것이다. 이와 연관해 우리는 하이데거 사상의 점차적 형성 과정에서 그의 독창적 언어들이 창조되고 있음을 다시금 관찰할 수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삶은 외부로부터 관찰될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그 안에 있고, 그 개별적 요소들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가 있는 곳에는 오로지 ‘이것’과 ‘이것’과 ‘이것’이 있을 뿐이다. 하이데거는 이 삶을 여러 차례 ‘여기 이것’이란 말로 설명하며, 그러다 갑자기 적절한 표현을 떠올린다. 생의 특징은 바로 “개별성Diesigkeit”이다.(GA 제61권, 88쪽) 이 “개별성”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그에 대해 철학은 대개 이런 식으로 답한다. 철학은 사람들이 “벌거벗은” 채 무방비한 상태로 자신의 시대를 돌아다니지 않도록 피신처를 만들어 준다. 그 피신처란 바로 가치와 전통, 체계, 사상적 구성물들이다. 사람들은 교양이라는 재화 뒤에 몸을 숨기고, 생명보험이나 건축 자금 적립 계약에 의지하듯 철학에 의존한다. 사람들은 노동과 노력을 투여하고는 거기서 얼마만큼 수익이 발생할지, 그것이 어떤 점에서 유용할지,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묻는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의하면 철학으로는 아무것도 드러낼 수 없다. 기껏해야 우리가 ‘하는 게’ 대체 무엇인지 정도나 분명히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은 “원칙적인 것”과 관계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원칙적인 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시원적인 것을 뜻한다. 그렇다고 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는 물음이 중요한 것은 아니며, 공리나 최상의 가치라는 의미의 시작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원칙적인 것이란 나를 끊임없이 내 삶의 초심자로 만들면서 나를 견인하는 무엇을 말한다.
--- p.198~199
그는 ‘실존한다’라는 용어를 타동사적으로 사용한다. 나는 실존함으로써 단순히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실존하게 해야만 한다. 나는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삶을 ‘영위해야’ 한다. 실존이란 하나의 존재 방식이며, 더욱이 “자기 자신에 접근할 수 있는 존재”이다.(DJ, 245쪽)
돌이나 식물 혹은 동물과 달리 그 어떤 자기관계에 있는 존재자가 바로 실존이다. 그것은 ‘있는’ 무엇일 뿐 아니라, ‘거기da’ 있음이 인지되는 무엇이다. 그리고 이런 자기 인지가 있기에 우려와 시간의 전체 지평도 열릴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한다는 것은 어떤 눈앞에 있음이 아니라 하나의 수행, 하나의 운동이다.
--- p.215
하이데거의 제자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아르놀트 폰 부겐하겐Arnold von Buggenhagen은 세미나 중의 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하이데거는 노트 같은 것은 보지 않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는 비범한 지성이 넘쳤으나, 그보다 더 돋보이는 것은 이야기의 방향을 규정하려는 의지의 힘이었다.
특히 이야기의 주제가 위험한 것으로 넘어가면 그런 힘이 강하게 표출되었다. 존재론적 주제를 이야기할 때 그의 모습은 교수의 이미지보다는 선장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거대한 함선조차 유빙으로 침몰할 위험이 있는 시대에 선교에서 대양 항해를 지휘하는 선장의 이미지 말이다.”
--- p.230
실제로 한나 아렌트는 그녀가 얼마나 하이데거를 잘 이해했는지 입증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그 자신보다도 더 잘 그를 이해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그녀는 그의 철학을 보정할 것이며, 그의 철학에 대해 그것이 결여한 현실성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죽음으로 앞서 달려감”에 대해 그녀는 탄생성의 철학으로 응답할 것이며, “각자성Jemeinigkeit”의 실존적 유아론에는 다원성의 철학으로 답할 것이다.
“세인Man”의 세계로 “빠져 있음Verfallenheit”에 대한 비판에 그녀는 “세계 사랑amor mundi”으로 답할 것이며, 하이데거의 “빛 트임Lichtung”에 대해서는 “공공성”의 철학적 찬미로 답할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그제야 완전한 무엇이 될 테지만, 이 남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는 한나 아렌트의 저작은 전혀 읽지 않거나 건성으로 보고는 치워 버릴 것이다. 그리고 읽은 내용 때문에 기분도 상할 것이다.
--- p.243
철학하는 자는 무엇을 투입해야 하는가? 그 자신의 불안과 권태, 양심의 부름에 대한 그 자신의 청취가 그 답이다. 참된 감각의 순간에서 시작되지 않는 철학하기는 뿌리가 없고 대상도 없다.
--- p.304
하이데거가 반응한 사건은 정치적인 것이었으며, 그의 행위는 정치적 지평에서 수행되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과 행위를 조종한 것은 철학적 상상력이었다. 그리고 이 철학적 상상력이 정치적 시나리오를 역사철학적 무대로 바꿔 버렸고, 이 무대에서는 존재역사의 공연 목록에서 고른 한 작품이 상연되었다. 그런 작품에서는 현실 역사가 거의 재인식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하이데거는 자기만의 역사철학적 작품을 상연하려 했으며 그 공연자를 모집했다. 그 몇 달 동안 하이데거는 모든 연설에서 “새로운 독일 현실의 명령하는 힘”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이 “명령”의 본래적 의미를 드러내는 것은 바로 그의 철학이다. 이 점에서 그는 한 치의 의혹도 남기지 않는다. 철학은 이 명령의 세력권으로 인간을 이끌어 인간이 내면에서부터 변할 수 있게 해 준다.
--- p.395
자연에 대한 이 두 가지 태도 방식, 즉 도발적 요청과 끌어내 앞으로 가져옴을 하이데거는 ‘세계상의 시대’보다 약간 앞서 행한 강연인 ‘사유란 무엇인가?’에서 인상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우리는 꽃이 만발한 나무 앞에 있다. 과학의 눈으로 관찰되지 않고 실천적 효과에 무관심한 순간에만 우리는 그 만발함을 제대로 체험한다. 과학의 시각에서 우리는 그 만발함의 체험을 소박한 무엇인가로 치부해 제거해 버리고 만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고 마침내, 꽃이 만발한 나무를 놓아 버리지 않고 그것이 서 있는 자리에 우선 서 있게 해 주는 일이다. 어째서 우리는 ‘마침내’라고 말하는가? 사유가 지금까지 나무가 서 있는 자리에 그것을 서 있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WHD, 18쪽) 즉 우리는 자연을 끌어내 앞으로 가져오지 않고 자연에 도발적 요청을 하며, “계산에 의해 확정될 수 있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나타내고 하나의 정보 체계로 주문될 수 있는 것”(TK, 22쪽)인 양 자연을 다룬다.
--- p.659